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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불후의 명작들’ 남기고 부고조차 없이 떠난 ‘방송 다큐’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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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다큐멘터리스트 고 정수웅 감독을 기리며

한겨레

2017년 10월 다큐멘터리 <고향이 어디세요> 시사회 때의 고 정수웅 감독. 마지막 작품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큐멘터리스트 정수웅(1943~2020) 감독 별세. 연초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지난 1월 5일 돌아가시고 7일에 발인을 했다고 하는데…, 고인의 유언에 따라 부음조차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러셨을까. 그 흉중을 헤아릴 길은 없다. 어쩌면 그다운 방식으로 세상과 작별하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인과 인연이 있는 지인들 중에 직접 문상을 하거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이가 거의 없었다. 나 역시 방송계 한 선배의 페이스북을 통해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 황망하고 숙연해질 따름이다.

고인의 뜻은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은 그럴 수 없다. 그는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산 역사이자 당대 최고의 다큐멘터리스트다. 아쉽게도 신문의 부고란이나 동정란에서도 그 분의 마지막 소식이 잘 보이지 않았다. 피디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에서 지난 10일 정 감독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기사를 뒤늦게 냈을뿐이다. 뒤늦게 글로나마 그를 기억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다행스럽다.

지난 5일 77살 별세…‘알리지 말라’ 유언

70년대 후반 방송대상 휩쓴 ‘전설의 대피디’

전두환 전기 제작 거부하고 82년 일본으로

3년뒤 귀국 독립제작사 ‘서울다큐’ 설립


85년 ‘우도 해녀의 출가’ 조연출로 인연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이다” 어록 생생

2018년 파킨슨병 투병중에도 ‘작품’ 열정


나와 고인과의 인연은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6월 문화방송(MBC) <인간시대>에서는 ‘현해탄 저편, 의지의 젊은 3세들’이라는 재일한국인 3세들의 성공담과 활약상을 취재한 프로그램을 3부작으로 방송했다. 재일 사업가 손정의, 야구 선수 김의명, 연극인 김수진 등이 소개된 이 프로그램의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에 들어가면서 정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어서 제주도 해녀 다큐멘터리인 <우도 해녀의 출가>에서 조연출로 호흡을 맞추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다큐를 하고 싶어 지원한 1년차 피디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정 감독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분>(1977), <석남사>(1978), <신라의 신비 대왕암>(1980)과 같은 한국문화의 원형과 원류를 찾는 프로그램으로 일가를 이룬 ‘대피디’라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특히 진도의 장례 풍습을 담은 <초분>으로 ‘다큐멘터리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든 하프상’(유럽 방송연맹 주최)을 수상했다. 방송대상 4년 연속 수상과 같은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1982년 <한국방송>을 그만 두고 일본의 니혼오디오비주얼센터(NAV)로 건너간 이유도 범상치 않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영상으로 연출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니 갓 입사한 새내기 피디로서 거장 선배를 모시는 것은 쉽지 않은 기회였다. 현장에서 그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몰입하는 방식이었다. 형형하고 부리부리한 그의 눈빛을 보면서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야 했다.

“다큐멘터리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다큐멘터리는 시대정신이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이고 다큐멘터리스트는 저널리스트다” 등 주옥같은 어록들도 그때 실시간으로, 육성으로 들었다. 대학 시절 국립병원의 시체안치실에서 주검을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다는 ‘무용담’에는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했다. 저 유명한 “다큐멘터리스트는 우주에서 파견된 스파이”라는 말도 정 감독의 어록이다. 그때는 이 말을 대선배의 호연지기(?)쯤으로 여기고, 우주를 칼 세건의 ‘우주’(Cosmos)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어떤 인터뷰에서 그가 “우주는 각자의 마음(하트)이다. 인간 자체가 소우주다. 다큐멘터리는 자기 속에서 나와서 자기를 나타낸다”는 답을 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1985년 일본에서 돌아와 독립제작사 <서울 다큐>를 설립한 이후로 정 감독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영상 총감독을 필두로 이후 포로감시원, 캄차카의 한인들,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만나는 사람들, 미소의 실크로드, 최승희,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그가 다룬 다큐의 소재는 영역과 시대에서 제약이 없었다. 독립피디로서 자유롭고 과감한 상상력은 아마도 지상파 다큐의 기획과 발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다큐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열린 마음으로 대상을 대할 것,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에 애정을 가질 것.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릴 것”( 2001년 ‘나만의 연출 노트’) 등이다. 메모리 카드식 카메라를 직접 들고 촬영하며, 일찍부터 비선형편집기(NLE·Non-Linear Editor)로 편집을 했던 ‘1인 시스템’의 원조격이기도 한 정 감독. 노익장으로 현장을 지키며 민족의 정체성과 원형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했다.

이제는 유작이 된 다큐영화 <고향이 어디세요?>(2017년)를 생각해본다. 1946년 전후 캄차카에 파견이 된 뒤 고향 땅을 밟지 못하게 된 조선인 노무자들의 사연을 기록한 작품이다. 1995년 <캄차카의 한인들> 제작 때 다시 오겠다고 했던 약속을 20년 만에 지킨 후속작이었다. 수난과 인고의 우리 현대사 이면에 도사린 비극이자 또 하나의 잊혀진 역사를 다루는 것은 정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2018년 어느 가을날 정 감독이 전화를 해왔다. <고향이 어디세요?>를 에미상에 출품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방법을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전화기로 들리는 육성이 몹시 어눌했다. 무슨 영문인지 여쭈었더니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말년에 지병이 깊어가는 와중에도 오로지 프로그램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겨레

2019년 4월 고 정수웅(왼쪽) 감독이 불교 신행공동체 붓다회 회장 성우(오른쪽) 대종사에게 자문위원 위촉장을 받고 있다. 생전 마지막 활동인 셈이다. 사진 BTN불교TV 제공


지난해 10월 책임피디를 맡은 문화방송의 한글날 특집 <겨레말모이>(2부작) 방송을 앞두고 정 감독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숫자 1’이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한참 바쁘신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렇게 뒤늦은 부고로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송구할 따름이다. 이제 한국 방송다큐멘터리사에 빛나는 불후의 명작들과 함께 정 감독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라도 방송에서 그의 명작들을 앙코르 편성하거나 방송회관에서 ‘정수웅 다큐멘터리 특별전’이라도 열어 추모해야 하지 않을까. 당대의 다큐멘터리스트를 보내는 제의(祭儀)가 이럴 수는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길화/전 문화방송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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