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별세]풍선껌으로 시작, 유통·관광·유화 망라한 ‘재계 5위 기업’ 이끌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83엔 들고 스무살에 일본행…신문·우유 배달하며 고학

자수성가 후 귀국해 1967년 롯데제과 설립…사업 확장

제2롯데월드 건설…그룹 이름 괴테 소설 주인공서 따와



경향신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와 1989년 7월12일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개관식에서 놀이기구 ‘마법의 태양’ 점등식 버튼을 두르고 있다. 롯데지주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일 향년 9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신격호 명예회장은 ‘풍선껌’으로 시작해 유통·관광·석유화학 등을 망라한 자산 기준 재계 5위 기업으로 키워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평가된다. 집무실 벽에 걸려 있던 ‘거화취실(去華就實·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은 버리고 내실을 챙긴다)’은 형식과 허례허식을 싫어했던 고인의 성품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셔틀경영’과 무리하게 차입하지 않는 ‘빚 없는 경영’ 등 그간 높이 평가받던 신 명예회장의 경영철학과 공적도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지분구조, 전근대적인 황제경영 등으로 빛이 바랬다. 아흔이 넘어서도 경영권을 손에 쥐고 승계구도를 확정짓지 않는 바람에 결국 평온치 못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 83엔 들고 일본으로 가다

신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4일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한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돈을 벌기 위해 일본행 관부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83엔이 전부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200만원이 안되는 금액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고학으로 와세다고등공업 응용학과(와세다대 화학과)를 다녔다. 원래 꿈은 문학도였다고 한다. 롯데라는 이름도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샤를로테’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연회장 이름도 ‘샤롯데룸’이다.

신 명예회장의 근면·성실함은 청춘 시절부터 유명했다. 일본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시간에 우유를 배달했다. 주문이 늘어 배달시간을 맞추기 어렵자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기도 했다. 첫 사업도 이런 모습을 눈여겨본 60대 일본인이 빌려준 5만엔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2년 만이다. 그러나 도쿄 근교에 빌린 윤활유 공장은 제대로 가동해보기도 전에 미군 폭격을 당해 불타버렸다.

훗날 신 명예회장은 당시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발판은 생활필수품 사업이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 그가 만든 비누와 포마드는 출시하자마자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1년도 안돼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신 명예회장은 돈을 꿔준 일본인에게 원금을 갚은 것은 물론 고마움의 표시로 집 한 채를 선물했다. 그는 롯데 창업 이후 직원들에게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 ‘신뢰를 지켜라’라고 말했다.

‘무차입 경영원칙’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평소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픽픽 쓰러진 다른 기업들과 달리 롯데그룹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경영철학 덕분이란 게 재계의 평가다.



경향신문

신격호 명예회장이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와 1991년 5월4일 서울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개점 기념식에 참석했다. 오른쪽은 신동빈 롯데 회장. 롯데지주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껌 사업으로 발판을 다지다

신 명예회장은 기업가로서 시의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1920년대만 해도 일본 상인들은 껌을 두고 ‘서구문명의 상징’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고인의 생각은 달랐다. 껌이 식품이 아닌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감’이라는 데 주목했다. 비누를 만들던 밥솥과 국수 뽑는 기계로 껌을 만들었다. 풍선껌을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대고 불 수 있도록 함께 포장해 팔았다. 껌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때 기틀을 다진 신 명예회장은 1948년 6월 종업원 10명을 뽑아 (주)롯데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마케팅 능력도 탁월했다. 껌 제조업체가 난립하자 당시 스타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광고모델로 내세우는가 하면, 2엔짜리 껌에 1000만엔 상금을 거는 이벤트까지 마련했다. 그는 차츰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

1959년 2월 롯데상사를 설립한 후에도 사업 포트폴리오를 계속 확대해 나갔다. 일본 가정에서 손님 접대용으로 내놓던 센베이 과자가 초콜릿으로 대체될 기미가 보이자 1961년부터는 초콜릿 제조업을 시작했다. 이미 메이지제과와 모리나가제과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의 초콜릿 제조 기술자를 영입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설비를 갖추는 등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이후 롯데는 사탕과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수 부문에도 진출해 일본 최대의 종합과자 브랜드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일본에서 기업인으로 자리 잡은 신 명예회장은 다시 고국땅을 밟고 투자에 나섰다. 기업보국(企業報國)이라는 기치 아래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2년 전 한국과 일본 간 국교가 정상화되면서다.

당초 신 명예회장은 제철소와 정유사업을 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민간에 맡길 수 없다고 해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국내에서도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껌 덕분이었다. 1972년 쥬시후레시·후레시민트·스피아민트 3종이 대히트를 쳤고, TV광고를 통해 CM송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이 인기를 끌면서 국내 껌 시장을 평정했다.

롯데가 국내에서 몸집을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계 은행 덕분이라는 평가도 있다. 일본롯데 때문에 일본 내 인지도가 높다보니 국내 금융회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금리로 자금을 융통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2011년 롯데쇼핑이 일본 은행에서 10조1861억원을 빌리면서 낸 이자는 1913억원으로, 금리가 1.8% 수준에 불과했다. 서울 잠실 제2롯데월드 사업 자금 대부분도 일본에서 조달했다.



경향신문

신격호 명예회장이 2011년 6월5일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 건설 현장에서 현장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롯데지주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신규 사업은 잘할 분야에서”

롯데는 1970년대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1974년 롯데칠성음료(칠성한미음료 인수), 1978년 롯데삼강(삼강산업 인수)·롯데햄·롯데우유, 1979년 롯데리아 설립 등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을 넓혔다. 롯데호텔(1973년), 롯데상사(1974년), 롯데쇼핑(1979년)도 세워 유통·관광기업으로서 기반을 갖췄다. 비유통 분야는 1973년 롯데기공·롯데파이오니아, 1976년 호남석유화학, 1978년 롯데건설(평화건설 인수) 등으로 계열사를 늘렸다.

그중에서도 호텔 사업은 롯데가 국내에 확실하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부 제안으로 호텔 사업을 시작한 신 명예회장은 반도호텔과 국립중앙도서관 등 소공동 인근 토지를 매입해 1973년 지하 3층, 지상 38층 롯데호텔을 지었다.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기 위해서는 당시 종로에 있던 지상 31층짜리 삼일빌딩보다 높아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555m, 123층인 국내 최고 롯데월드타워의 꿈이 그때 시작된 셈이다.

제2롯데월드는 신 명예회장의 숙원 사업이었다. ‘고국에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꿈은 1987년 12월 서울 잠실 부지를 매입한 지 약 30년 만에 이뤄졌다.

논란도 많았다.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제2롯데월드 건설 사업이 이명박 정부 들어 급진전되자 특혜 논란에 휩싸였다. 주변에 석촌호수 수위 저하와 교통대란 우려가 나온 데다, 안전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한때 영업정지를 당했다.

앞서 1989년에는 서울 잠실에 세계 최대 실내 테마파크인 롯데월드를 세웠다. 그룹 내부에서는 당시 호텔과 백화점, 놀이시설이 함께 들어서는 게 사업성이 있겠냐는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신 명예회장은 사업을 다각화할 때 원칙을 지켰다. “잘하지도 못하는 분야에 빚을 얻어 사업을 방만하게 해선 안된다”며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미래 사업 계획을 강구해 신규 사업 기회를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롯데지주 측은 전했다. 신규 사업은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창출하면서 핵심 사업 역량을 강화해야 추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날 고인의 별세 소식에 재계는 애도와 존경을 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신 명예회장이 보여준 열정과 도전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기업인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느 재벌처럼 신 명예회장의 폐쇄적이고 전근대적인 경영 방식에는 비판이 뒤따랐다.

2015년 7월 그가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진을 ‘손가락으로 해임’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사장단 회의나 주주총회 등을 거치기보다 주요 의사결정은 오롯이 그의 한마디로 이뤄졌던 그간의 독단적인 황제경영이 도마에 올랐다. 2006년 신동빈 회장이 롯데쇼핑 기업공개(IPO)를 추진할 때 “회사를 왜 남에게 파느냐”고 질책했던 이야기도 다시 회자됐다.

일부 지분을 통한 폐쇄적 계열사 지배나 복잡한 일본롯데와의 관계 등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는 결국 아들 간 경영권 다툼의 불씨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성희 기자 mong2@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