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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디지털 성범죄, 손 맞잡고 ‘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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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이후 수많은 파생방 건재

성착취·불법 영상 공유 등 여전

여성들이 텔레그램 신고 나섰다

경향신문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에 함께해주실 분들을 구합니다.” 2019년 12월16일 트위터에 한 계정이 생겼다.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이다. 여성들이 모였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디지털 성범죄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성착취·불법촬영 영상이 공유되는 텔레그램 채널과 계정을 신고하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채팅방과 끝없이 유포되는 영상들, 대책 없이 늘어나는 피해 여성들…. 이들이 목격한 텔레그램의 현실이었다.

디지털 성범죄는 여전히 낯선 말이다. 범죄 현장이 온라인이다 보니 가볍게 여겨지기도 한다. 가해자들은 소라넷과 웹하드 카르텔을 거쳐 텔레그램으로 숨어들었다. 장소를 옮겨가며 그들만의 거대한 ‘디지털 성범죄 소굴’을 꾸렸다. 지난해 알려진 ‘n번방’에선 여성의 신상을 털고 협박했다. 성착취 영상 촬영을 강요하고 유포하는 범죄가 이어졌다. ‘n번방’은 자취를 감췄지만 수많은 파생방은 건재하다. 아동·청소년 성착취, 불법촬영, 지인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한 ‘지인능욕’까지 범죄 방식도 다양하다.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여성은 ‘사람’이 아닌 ‘재화’다. 수익을 위한 상품이다. 남성 가해자는 이 ‘상품’으로 집단 내 권력을 꿰찬다. ‘디지털 성범죄 소굴’이 몸집을 키우는 동안 여성의 일상은 불법촬영, 단톡방 성희롱으로 위협당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해마다 급증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시정요구를 받은 성범죄 영상은 2015년 3636건에서 2019년 상반기만 1만6263건으로 4배 늘었다.

법과 제도는 낯선 유형의 성범죄에 아직 완벽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리셋에 지원한 여성들은 수사기관에 신고할 때도, 피해자를 도울 때도 한계를 느낀다고 말한다. 법과 제도의 영향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이들은 직접 디지털 성범죄 현장을 모니터링하고 신고한다. 일상과 현업을 따로 두고 매일 텔레그램에서 신고 작업에 나선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여성을 재화로 취급하는 강간문화가 사라져야 한다”며 “디지털 성범죄가 없어지는 날까지 리셋 프로젝트는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리셋에서 활동 중인 남혜리, 라떼, 계돌, 블웩을 만났다.

■ 심리치료 받으면서도 활동…‘디지털 성범죄 소굴’ 무너뜨리려는 여성들

텔레그램 ‘성착취 영상’ 신고하는 프로젝트 ‘리셋’

경향신문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에 참여한 4명이 지난 14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기 전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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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 네 명의 출발은 같았다. #n번방 #박사방 #몰카 #고딩…. 성착취·불법촬영 영상을 홍보하는 계정이 트위터에 너무 많이 보였다. 계정마다 피해 여성이 있었다. 어느 날 텔레그램에선 영상을 공유하는 대규모 채팅방이 있다는 걸 알았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혜리는 n번방을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유형의 성착취”라고 봤다. 트위터 ‘SNS 아동청소년 성매수 근절 프로젝트’에서 활동했던 남혜리는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 계정을 만들었다.

라떼, 계돌, 블웩은 개별적으로 트위터 성착취 계정을 신고하다가 리셋에 지원했다. 계돌은 “밤마다 계정을 신고해도 피드백 한 번 없는 트위터에 지쳐 번아웃이 오기 직전이었다”고 말했다. 계돌은 “n번방 이야기를 들었을 땐 현실감조차 없었다”며 “지금껏 신고해온 것보다 더 잡기 어려운 ‘스마트 빌런(악당)’이 나타난 것”이라며 리셋 합류 계기를 설명했다. 블웩에겐 남 일이 아니었다. 6개월 만난 남자친구가 자신의 영상을 몰래 찍은 걸 발견했다. ‘나한테도 일어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안이했다는 생각이 들 때 리셋을 알았다. 속상함은 분노로 바뀌었다. “성관계가 남성에겐 협박의 도구, 여성에겐 약점이 된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트라우마 때문에 참여를 고민했는데,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혹은 느끼게 될지 모르는 여성들을 위해 참여하기로 결심했어요.”

성착취·불법 영상 공유 채널

모니터링하며 매일 신고 인증

‘신고 접수됐다’ 기계적 답변만

“채팅방 정지 기준 몰라 답답”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은 성착취·불법촬영 영상이 공유되는 채널에 접근했다. 모니터링하며 신고에 나섰다. 한 명당 매일 60~70개 채널과 영상 유포자 개인 계정을 텔레그램에 신고한 후 인증한다. 남혜리는 “신고를 얼마나 해야 채널이 정지되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며 “텔레그램은 ‘신고가 접수됐다’는 기계적인 답변만 보내지만 꾸준히 신고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해당 채널이 없어지면 신고 효과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들은 텔레그램 채널을 홍보하는 트위터 계정도 신고한다. 디지털 성범죄를 공론화하기 위해 국회 청원, 청와대 국민청원 서명을 장려한다. 성착취, 지인합성, 불법촬영 피해자에겐 피해자 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여성은 ‘거래되는 재화’에 불과해요. 같은 사람으로 안 보는 거죠.” 계돌이 말했다. 수많은 채팅방에서 성착취 영상은 현금, 포인트, 레벨을 위해 거래된다고 설명했다. 남성 가해자 집단을 견고하게 만드는 수단이기도 하다. 피해 여성을 희롱하고, 모욕하며, 공유할수록 채널이 활발하게 운영된다. 계돌은 “(피해 여성을 매개로) 공범이 돼 함께하기를 종용하며 채팅방이 운영된다”고 했다. 이어 “피해 여성이 자살했다는 사실조차 조롱의 대상”이라며 “누군가 (성착취 영상이) 박제되면 ‘얘도 죽으면 어떡해’ ‘죽기 전에 보여주고 가’ 같은 말이 나온다. 채팅방에서 오가는 대화와 그들의 사고방식이 영상보다 더 충격적”이라고 했다.

모든 여성이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수 채널에서 성범죄는 무분별하게 벌어진다. 화장실방(공중화장실 불법촬영물만 공유하는 채널), 지인제보 능욕방, 지역별·직업별방 등 다양하다. 라떼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이버 불링(온라인 괴롭힘)이 이뤄진다”며 “1월1일엔 새해라면서 화장실방이 등장했다. 개인 SNS 계정에 사진을 올리기만 해도 합성해 음란물로 만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인제보방·지역별방 등 다양

현금·레벨 목적으로 영상 거래

여성을 성적대상으로만 취급

한 방에 2만명 이상 참여하기도


이들은 피해자를 탓하는 사회적 시선을 반대했다. 모든 여성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문제란 뜻이다. 실제 ‘n번방’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후 교묘하게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만 피해가며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영상을 공유하는 방들이 운영되고 있다. ‘전 여친 영상을 공유한다’는 식이다. 많게는 한 방에 2만명 이상이 참여한다. 채팅방들은 공개방-비공개방-고액방 등 체계적으로 나눠진다. 블웩은 “최근엔 친구의 동생인 17살 고등학생의 지인능욕 사진이 올라왔다. 정말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것”이라며 “가끔 내가 나올까봐 무섭기도 하다”고 말했다.

남혜리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뿐만 아니라 지인합성, 불법촬영이 활개를 친다”며 “일탈계(얼굴과 신상 노출 없이 자신의 노출 사진이나 글을 올리는 ‘일탈계정’의 줄임말)를 운영하거나 빌미를 줬다면서 피해자를 탓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근본 문제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가해자와 피해 여성을 양산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 신상 털리는 꿈도 꾸지만

스트레스 안고 사는 방법 터득”

플랫폼들, 제재 등 책임 방기

“수사·사법기관 적극 대응해야

민관 협조 빠른 프로세스 필요”


리셋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신고 과정 자체는 간단하지만 정신적 부담이 따른다. 매일 성범죄 현장과 피해 여성이 등장하는 영상을 보는 일은 힘들다. 라떼는 개인 신상을 털리는 꿈을 꾸고, 블웩은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신고를 이어간다. 남혜리는 “성착취 사진과 영상을 계속 접하는 건 심리적으로 부담되는 일”이라며 “신고 절차에 1일 1회 인증을 도입한 이유도 꾸준히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 채널에 들어가지 않다보니 서로 독려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뜻이다. 계돌은 “명상처럼 각자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고 활동에 어려운 점도 있다. 개인이 거대한 디지털 성범죄 현장을 상대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들은 텔레그램 등 플랫폼을 제공하는 메신저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신고가 반영되는지, 운영 가이드라인이 있는지 ‘깜깜이’란 뜻이다. 문의해도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라떼는 “스티커 형식(여성의 나체, 성착취물 등을 이모티콘처럼 사용하는 것)이나 성착취물이 유포되는 링크는 (음란물 항목으로) 신고할 수도 없다”고 했다.

남혜리는 “신고를 꾸준히 해 계정이 정지되면 가해자들은 ‘대피소’라는 다른 채널로 이동한다. 다시 영상 유포가 시작되는데 방이 만들어지는 속도를 신고 속도가 따라잡지 못한다”고 했다. 이어 “텔레그램 등 기업에서도 불법촬영물 등을 필터링하는 기능을 만들고, 유포 계정에 대해 공조수사에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리셋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디지털 성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계돌은 “절차와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다뤄야 하는 수사기관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도 “모든 디지털 범죄를 사이버안전국이 담당하는 상황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부족하다”고 했다. 계돌은 과거 수차례 사이버안전국에 불법촬영 등 사이버 성범죄를 신고했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신상정보가 명확하지 않고, 제3자로서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돌은 경찰에게 ‘디지털 성범죄 신고나 제보를 넣을 수 있는 제대로 된 경로가 없냐’고 묻기도 했다. 라떼는 “디지털 성범죄는 플랫폼에 따라 계속 새로운 수단이 나온다”며 “수사기관이 민관과 협조하면서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고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라떼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도 개선돼야 한다”며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피해 범위를 가늠할 수 없는) 피해자는 공포와 걱정 속에 산다. 반면 가해자들은 별거 아닌 듯 가벼운 범죄로 여기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형량이 지나치게 낮기 때문”이라고 했다. 리셋은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10일 신설된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청원을 올렸다. 국민동의청원은 국회의원을 거치지 않고 누구나 법안을 제안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에서 디지털 성범죄의 엄격한 양형기준 설정, 수사기관의 국제 공조수사 등 요구를 담았다.

리셋 활동가들은 인식 변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를 탓하지 않아야 하며, 여성을 사람이 아닌 재화로 인식하는 문화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계돌은 “디지털 성범죄는 성착취·불법촬영 영상 수요자와 가해자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며 “손가락질은 오로지 가해자에게만 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없어질 때까지 활동을 이어가며 피해 여성과 연대할 계획이다. 블웩이 말했다. “피해자는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해요.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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