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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금주의역사 - 1월20~26일] 스위스 시계보다 값진 스위스 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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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대가 스위스인 병사들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의아해한다.

이탈리아 영토 안에 자리 잡은 바티칸 근위대가 왜 스위스인들로 구성된단 말인가?

그 기원을 알고 보면 더 놀랍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는 1506년 1월22일부터 근무해온 것이다.

교통도 불편하던 16세기 초에 왜 그 산골짜기 나라에서 사람을 불러온단 말인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산악국가여서 바티칸 근위대를 배출한 셈이다.

오늘날 바티칸은 평온하고 따라서 근위대는 의장대처럼 보이나 그들의 족보는 ‘용병’이다. 용병. 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

그런 일에는 산골짜기 사람들이 제격이다. ‘관광’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스위스에는 눈은 많았으나 먹을 것은 부족했다.

그래서 적은 자원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도 했으나 용병도 좋은 산업이었다. 더욱이 산을 오르내리며 단련된 몸은 용병으로서 제격이다.

그러고 보면 스위스 용병과 쌍벽을 이루듯 명성이 높은 구르카 용병들도 네팔 고산지대의 구르카족이다.

하지만 용병의 가장 큰 요건은 ‘주인(고용주)’에 대한 충성도다.

용병들은 대부분 ‘살기 위해’ 용병 노릇을 하기에 전세가 불리하면 도망치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스위스제 시계처럼 정확히 충성을 지켰다.

프랑스혁명 당시 무장 군중이 루이 16세를 붙들러 튀를리 궁전에 몰려오자 786명의 스위스 용병이 그를 지키려다 전원 사망한 것은 너무 유명한 일이다.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청을 위해서도 피를 흘렸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쳐들어오자 다른 용병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스위스 근위대 189명 가운데 147명은 전사하고 나머지는 교황의 피신을 도왔다.

양평(언론인)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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