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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단독] 대법, 고법에 "재정전담부 안 만들면 재판부 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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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독점한 기소권 견제하는 역할… 서울고법 반대하자 압박

판사들 "양승태 대법원 비판해놓곤, 더 노골적 사법행정권 남용"

일각선 "총선 앞두고 靑이 선거법 사건 통제하려는 것" 의심도

대법원이 작년 말 서울고법이 '재정전담 재판부' 설치를 거부하자 '그러면 다른 재판부를 줄여야 한다'고 압박한 것으로 19일 전해졌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재정전담부를 설치하면 재판부 추가 축소는 재고(再考)할 수 있다'며 사실상 '회유'했다는 것이다. 재정(裁定)신청은 검찰이 불기소 결정한 사건을 법원이 다시 검토해 사안에 따라 재판에 회부하는 제도다. 검찰이 독점한 기소권을 사실상 법원이 행사하는 것으로, 확대할수록 검찰에 대한 유력한 견제가 된다.

이처럼 대법원 압박이 거세지면서 최근 서울고법 상층부는 대법원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전체 판사회의에 회부하자'는 내부 의견으로 다시 제동이 걸리는 등 서울고법은 이 문제로 심각한 내홍(內訌)을 겪고 있다.

19일 복수의 서울고법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창보 서울고법 원장은 지난해 11월 중순 이 법원 소속 판사들로 구성된 법관 사무분담위 안건으로 '재정전담 재판부 신설'을 제안했다. 현재 서울고법 행정부 1~11부가 나눠 재판하는 재정신청 사건을 한데로 모으자는 것이다. 고법 내부적으로 "대부분 검찰 결론대로 기각할 수밖에 없고 정신질환자나 악성 고소인이 몰려 있어 가혹한 업무 배분"이란 반대가 많았고, 사무분담위는 11월 26일 재정전담부는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법 재판부 중 네 개를 없앤다는 내용은 논의해온 대로 확정됐다.

그러자 대법원은 8일 후인 12월 4일 서울고법에 "수원고법 등이 신설돼 서울고법 재판부를 4개가 아닌 6개를 없애야 한다. 다만 재정전담부를 만들면 재고할 수 있다"는 연락을 해 왔다. '압박'을 느낀 서울고법 상층부는 사무분담위원들에게 "다시 논의해 보자"고 했다. 김창보 원장은 지난 8일 위원들과 오찬을 하면서 "재정신청 인용률이 너무 낮아 방안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작년 10월 초 "서울고법의 재정신청 인용률이 0.21%로 전국 법원 중 최하위"라고 한 것을 떠올리게 했다. 이에 위원들은 "법원이 민감한 시기에 검찰 견제를 강화하는 모양이 되면 부적절하다"고 반응했다고 한다. 당시 여권은 조국 전 장관을 수사하던 검찰을 '검찰 개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한 관계자는 "김 원장이 개인 생각인 것처럼 말했지만 대법원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당시 김 고법원장의 설득에 지난 14일 다시 사무분담위가 열려 재판부 신설을 정면 반대하지는 않는 쪽으로 정리됐다. 그러나 한 위원이 "사무분담위가 아닌 전체 판사회의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제동을 걸면서 오는 22일 고법 전체 판사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그 결과가 주목된다.

이처럼 구성원 반대를 무릅쓰고 법원 수뇌부가 무리하게 특정 재판부 신설을 추진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재정신청 사건 상당수가 기각되는데 대법원이 재정전담부 신설을 밀어붙이는 이유에 대해, 법원 일각에선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가 법원을 통해 선거사건을 통제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선거법 사건은 2018년 기준 전체 재정신청 사건 2만4000여 건 중 146건이지만, 재정 결정으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면 선거 결과가 바뀔 수 있다. 또 다른 사건과 달리 선관위가 검찰 항고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법원에 재정신청을 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지시·압박한 사실이 없다"고, 김창보 서울고법원장은 "국민 권리 구제를 위한 것으로 다른 뜻은 전혀 없다"고 했다.

지금 대법원 구성원들은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사람들이다. 이번 재정전담 재판부 신설을 추진하는 모습을 두고 한 고등법원 판사는 "재판부 존폐(存廢)를 조건으로 건 것은 그때보다 더 노골적인 사법행정권 남용"이라고 했다.

☞재정(裁定)전담 재판부

재정 신청은 검찰이 불기소한 사건에 대해 고소·고발인이 고등법원에 재판에 회부해달라고 신청하는 제도. 검찰의 '기소독점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고법이 재정 신청을 받아들이면 관할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된다.

[양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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