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4 (화)

[일사일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휘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백윤학 지휘자·영남대 교수


"그럼 어떤 걸 하시는 거예요?"

통성명을 하고 지휘자라고 소개한 후 몇 마디 대화가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받는 질문이다. 지휘자가 하는 일이 뭔지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닐 거다. 쳐다보지도 않는 오케스트라 단원 수십 명을 앞에 두고 아무나 할 수 있는 동작으로 허공에 팔을 흔드는 걸 직업이라고 하니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피아니스트나 성악가는 받지 못하는 일종의 특수한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살짝 웃으며 답해드린다. "글쎄요."

모든 지휘자가 지적하듯 지휘를 배우기는 어렵지 않다. 누구라도 반나절이면 기본적 지휘법을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지휘자가 되는 것은 다른 얘기다. 복잡한 악보를 철저히 분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노련한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납득시킬 만한 음악적 역량과 경험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 단순히 하나 둘 셋 박자만 젓는 지휘가 아니라 한정된 시간 동안 몸짓과 표정으로 작품의 아름다움을 단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성악가와 피아니스트 같은 연주자들은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평가받지만 지휘자는 첫 연습 때부터 오케스트라 내 베테랑(전문) 음악가 수십 명에게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지휘자가 하는 일은 이처럼 겉보기와 다르게 복잡하고 어렵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궁극의 지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휘다.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이 아무리 뛰어나도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음악 생활을 한 훌륭한 음악가 수십 명의 자연스러운 음악을 넘어서기 어렵다. 내 지휘만 옳다며 자기 음악을 강요하는 독선 앞에서 오케스트라는 입을 닫아버린다. 중국의 성군인 요임금이 저잣거리에 나가 민심을 살피던 중 들은 노래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먹고 우물을 파 마시니 내가 배부르고 즐거운데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함포고복(含哺鼓腹). 임금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할 일 하며 행복하게 사는 백성을 보며 요임금은 무척 기뻐했다. 훌륭한 지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시 웃으며 답해드린다. "단원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백윤학 지휘자·영남대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