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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알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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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편집장의 편지

한겨레21

또 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두 번이나 찾았던 이성당의 빵이 목요일 오후 마감으로 한창 바쁜 뉴스룸에 도착했다. 매달 셋째 목요일 빵을 보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식었지만 빵맛은 그대로다. 보낸 이는 ‘독자 겸 후원자’라고 밝혔다. 익명이다.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 좋으련만, 자신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다. 빵을 삼키면서 익명의 기부천사가 떠올랐다.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과 달리 기실 우리는 자랑에 후하다. 좋은 일에, 칭찬받을 만한 일에 굳이 이름을 숨기지 않는다.

나쁜 일, 욕먹을 만한 일엔 정반대다. 들키지 않았는지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이름이 탄로 날까봐 제 이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싶은 유혹마저 느낀다. 감추고 싶은 재산이나 범죄, 행동에 차명을 쓰는 이가 숱하다. 선행에는 차명이 영 어색하다.

지난주 검찰이 항소심 재판을 받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3년을 구형했다. 1심 때 그는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시트를 생산해 자동차회사에 납품하는 다스를 그의 형 이름으로 소유하면서 저지른 범죄 탓이다. 회사의 실제 주인은 그였다. 다스 증자에 쓰인 서울 도곡동 땅도 처남 이름으로 보유했다가 팔았다. 그는 수십 년간 자기 재산을 차명으로 숨겨왔다.

차명은 실제 재산만을 숨기는 게 아니라 범죄도 감춘다. 차명을 못 쓰게 한 것도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서는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으며 진정한 분배정의 구현도 어렵다.” 1993년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실명제를 도입한 이유였다. 4년 뒤 금융실명제법이 제정됐으나, “금융거래시의 불편과 세무조사에 대한 불안” 등의 문제를 고치겠다면서 약화했다. 지난해 말까지 11차례(타법 개정 제외) 고쳐졌으나, 위반했을 때 처벌 규정은 더디면서도 약하다.

잘 들통나지도 않는데다 여전히 차명으로 얻는 이익이 손실보다 크다. 남의 이름을 빌려 재산을 숨기는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사건에서도,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기소된 손혜원 의원 사건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 사위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대표이사 사장의 횡령 사건에서도, 상속받은 주식을 감춰온 이웅열 코오롱 명예회장 사건에서도, 다 차명이 문제였다. 다른 사람 이름으로 주식을 보유하거나 계좌를 개설해 쓰거나 부동산을 매입한 혐의다. 차명은 범죄에 동원되는 가장 흔한 수법 중 하나이지만, 이름을 빌려준 사람과 빌린 사람의 은밀한 담합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수사나 조사가 아니면 좀체 알 수 없다.

그러니 달콤한 유혹이다. 신분을 숨긴 채 금융자산뿐만 아니라 땅과 건물을 사거나 팔면서 탈세하거나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세금도 아끼고, 법망을 피해 이득도 취한다. 거꾸로 사회엔 손실이다. 시장의 질서와 규칙은 깨지고 세수도 준다.

20대(2016~2020년) 국회 들어서도 22건의 금융실명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그중 하나는 차명재산을 적발하거나 과세하기 위해 금융회사 등의 상업장부와 영업에 관한 중요 서류(현행 10년), 전표 또는 이와 유사한 서류(현행 5년)의 보존 기간을 15년으로 연장(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을 고치려는 취지는 이렇다. “과세 형평성을 제고하고 차명재산 근절을 도모하려는 것임.”

조금씩 법은 다듬어지고 있으나 범죄의 유혹을 차단하기엔 아직도 역부족이다.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게 아름다우나, 사리사욕을 채울 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알게 해야 한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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