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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기획 시론] 아직 젊은 한국 민주주의에 품어보는 두 가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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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2020

복잡한 정치적 선택 단순화 말고

사회 균열·분노·불신을 돌아보자

중앙일보

송지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국회에서 진행된 필리버스터를 보며 개정 선거법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법에 대한 양질의 토론을 기대했던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간 끌기가 목적이기도 한 필리버스터의 속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국회에서 쏟아진 막말, 사실관계 왜곡, 근거가 불분명한 의혹 제기는 이제 한국 정치 토론의 상수(常數)가 돼버렸다.

말하는 내용이 무의미하거나 혼탁하니 듣는 이들도 내용보다는 맥락에서 드러나는 정보, 가령 어떤 정치인이 어떤 이익을 위해서 어떤 언어 곡예와 자기부정까지도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관심을 둔다. 토론의 청중이 아니라 씁쓸한 정치 드라마의 시청자가 된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4월 총선에 특별한 기대를 하기 어렵다. 후보들이 현안에 어떤 입장인지, 입장이 있기나 한 것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설령 상세한 공약이 있더라도 지킬 마음이 없는 선거용 발언일 가능성이 꽤 있다.

그러나 새해는 근거 없이 희망을 품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니 철학자의 말에 기대어 2020년 정치권에 두 가지 소망을 품어본다. 영국 정치철학자 마틴 오닐은 아인슈타인의 구호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러나 더는 단순하지 않게”(as simple as possible, but not simpler)를 정치 담론의 수칙으로도 제시한다.

정치적 가치 판단이나 정책 선택은 무척 복잡하다. 이미 복잡한 문제를 쓸데없이 난해한 포장이나 불순한 말장난으로 더 복잡하게 만들지는 말자는 얘기다. 동시에 사안을 그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양자택일의 문제인 듯 단순화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든지 결과는 현실에 맞지 않아서 실패하는 정책이다.

미국 철학자 셔나 쉬프린은 거짓말과 기만이 민주주의 정치와 협동의 조건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협동이 가능하게 하려면 서로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는 소통이 필요하다. 거짓말과 기만은 이러한 소통의 경로를 오염시킨다. 상대가 나를 속일 수 있다는 의심이 팽배한 사회는 비효율적일뿐더러 서로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곳이다.

손쉬운 거짓말로 위기를 넘겨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은 타인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한다. 지킬 마음 없는 공약은 국민을 사람이 아니라 단지 투표장의 숫자로만 여긴다는 선언이다. 정치인이 국민을 이렇게 보고, 국민도 이를 뻔히 아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협동이 가능할 리 없다. 그렇지만 협동은 정의로운 사회의 필수 요건이다.

이번 총선에서 명쾌하고 진실하게 소통하는 정치인을 만나 볼 수 있을까. 역시나 쉽지 않을 거다. 그러나 냉소나 단념도 대안은 아니다. “정치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니, 꿈 깨라”고 하기 전에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된 한국사회의 균열과 분노·불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 국제 정세를 두고 학자들은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를 얘기한다. 민주주의·인권·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국제 질서가 와해할지 모른다는 우려다. 어떤 아시아 국가에서는 이를 두고 “애초에 서구의 산물이지 우리의 질서가 아니다”라고 한다.

한국은 그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전후 한국은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받아들였고, 국내 정치에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투쟁으로 얻었으며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회가 됐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아직 젊은 민주주의 제도의 견고함이 끊임없이 시험받고, 주변 국가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에는 침묵하는 곳이기도 하다.

격변하는 시대에 이 사회의 정치적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지, 선택을 오래 미루지는 못할 것이다. 이 복잡한 선택을 온전히 직시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경계심을 갖춘 정치인이 총선의 해인 2020년엔 더 절실하다.

송지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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