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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오강돈의 중국 마케팅 (88) 중국과 러시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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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일보·신화통신사·중국중앙텔레비전 3개 社 중심의 中 언론
집권당 기관지 프라우다, 행정부 소속의 통신사 타스…中·北에 영향

조선비즈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미디어 환경은 빠르게 바뀌었다.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잡지등 전통적인 언론의 영향력은 급격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디어의 물결에 직면한 지 오래다. 사람들은 과거처럼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선택하여 각자 편리한 시간에 소비하며, 또 양방향 소통이 가능해졌다. 개인은 콘텐츠를 자유롭게 생산하는 미디어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주의를 막론하고 많은 나라가 전통매체와 뉴미디어를 넘나들며 국민에 대한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언론을 사용해온 것 또한 현실이라 하겠다.

사회주의권 국가, 또는 과거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국가의 언론 역사에는 그들의 특징이 있다. 중국의 경우 인민일보, 신화통신사(신화사), 중국 중앙텔레비전(CCTV)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주요 언론이다. 이외에 가끔 인용되는 환구시보같은 언론은 인민일보가 만들며, 신화통신사와 중국중앙텔레비전 산하에도 많은 언론이 있다. 이렇듯 중국의 언론은 인민일보, 신화통신사, 그리고 중국중앙텔레비전의 세 축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북한 역시 노동신문, 조선중앙통신, 그리고 조선중앙텔레비죤을 주요 언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중국과 흡사하다.

이러한 사회주의권 국가의 언론 체계는 소련의 그것을 닮아있다. 첫번째 축인 신문을 살펴본다. 제정러시아 치하에서 혁명을 꿈꾸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그들의 주장을 담은 신문을 만들었다. 2월혁명과 10월혁명의 성공으로 소련 건국의 기초가 마련되고 이 신문은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가 되었다. 신문의 이름은 ‘프라우다(Пра‎вда∙진리)’이다. 그러면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다수파인 볼셰비키 레닌이 집권 이후 가장 먼저 했던 일 중의 하나는 기관지 이외 여타 언론의 통제를 위한 포고령을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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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1일자 프라우다. 왼쪽에 레닌(Ленин)의 얼굴이 있다. 위에서부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소련 공산당(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프라우다(Пра‎вда)’, ‘기관지(Орган)∙중앙 위원회(Центрального Комитета)’.



프라우다는 오랜동안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로 기능했다. 그리고 전세계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배포되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고 해당 국가들 당기관지의 모델이 되었다. 나중에 구소련 해체 시기 1991년 옐친에 의해 폐간되었다. 참고로 현대 러시아에는 나중에 두가지 프라우다가 생겼다. 폐간되었다가 1999년 예전 직원들이 주도하여 복간한 것은 ‘프라우다 온라인’이다. 또 이들과는 관계없이 새로 창간된 신문 ‘프라우다'가 있다.

사회주의권 국가 언론 체계의 두번째 축인 통신사에 대해 알아본다. 유럽 각국은 1800년대 중반부터 뉴스의 빠른 공유를 위해 신문과는 별도로 통신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정러시아에는 1900년대초에 통신사가 생겼는데, 러시아 혁명세력은 2월혁명 이후 이것을 ‘로스타(РосТА∙Российское Телеграфное Агентство∙RosTA∙러시아 텔레그라프 에이전시)’라는 통신사로 바꾸어 활용했다. 로스타는 소련 건국후 1925년에 우리가 잘 아는 ‘타스(ТАСС∙Телеграфное Агентство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TASS∙텔레그라프 에이전시 소비에트 소유즈)’가 되었다.

공산당 산하의 프라우다와 달리 타스통신은 행정부(내각회의) 소속이었다. 타스통신은 소련의 여타 언론사와 세계 각국에 뉴스를 공급했다. 타스통신은 구소련 해체시기 1992년 옐친에 의해 ‘이타르(ИТАР∙Информационное Телеграфное Агентство России∙ITAR∙인포메이션 텔레그라프 에이전시 러시아)-타스’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제 국영 통신사라고 하기는 어려우며, 다른 통신사들도 생겨났다.

소련 언론 체계의 영향을 받은 중국으로 가본다.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이자 유일한 언론으로 1931년 시작된 조직은 인민일보가 아니라 신화사이다. 처음 이름은 홍색중화통신사(红色中华通讯社∙약칭 홍중사)였다. 대장정 이후 1937년 중국공산당이 연안에 있었던 시절, 홍중사에서 신화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과 항일투쟁 시기인 1940년, 신화사 아래에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 활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에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의 기관지로, 신화사는 국내외에 뉴스공급을 전담하는 통신사로 각각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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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사 엠블렘과 로고 ‘新華社’. ‘통신사’의 한자 표기는 한국(通信社)과 중국(通訊社)이 다르다. 그래서 엠블렘 안에 ‘신(讯∙간체)’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중국의 신화통신사는 소련의 타스통신처럼 행정부(국무원) 소속으로 되어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모택동은 신화사의 역할 강화를 강조하였고, 조직은 커졌다. 이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신화사의 역할 확대를 주문하였고 중국 언론 중에서 가장 많은 해외 네트워크를 운용하게 되었는데, 배경과 상황을 인식한 서방 국가들은 신화사를 중국의 정보기관에 준하는 조직으로 간주하고 있다. 홍콩 시위대는 신화사 홍콩 사무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중국 당국의 직제상으로 판단하면 신화통신사의 수장은 장관급으로, 인민일보나 중국중앙텔레비전(CCTV)보다 높다. 신화사의 신화망(新华网∙xinhuanet.com)은 현대 중국에서 가장 권위적인 인터넷 뉴스로 여겨진다. 신화사의 사진 자료는 역사적, 양적, 질적으로 중국 최대이며 국가의 기록보관소(档案局∙당안국)와 공동으로 신문사진자료 아카이브를 운영한다.

소련의 프라우다에 해당하는 당기관지 신문이 중국의 인민일보, 북한의 노동신문이다. 인민일보의 가장 큰 사명은 당의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선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하여 뉴스를 보도한다. 인민일보는 1946년 창간되었고 1949년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로 기능했다. 산하에 환구시보(环球时报∙글로벌 타임즈), 증권시보, 시장보, 건강시보, 중국자동차보, 국제금융보, 중국에너지보, 중국도시보 등 다수의 언론을 거느리고 있다. 인민일보의 인민망(人民网∙people.cn)은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소 관계가 긴밀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졌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프라우다를 러시아어 원문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중국인들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프라우다는 1953년부터 ‘진리보(真理报)’라는 중국어판으로도 인쇄되었다. 중국어판은 중국에서 읽혀졌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 거주하는 화교, 유학생, 기술연수생 등도 구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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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인민일보. ‘人民日报’는 1946년 7월 1일 모택동의 글씨이다.



사회주의권 국가, 또는 과거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국가에서 언론은 당과 국가의 주요한 도구로 활용되기에 ‘마우스 피스’로 불리운다. 소련 언론 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에서도 언론은 당과 국가의 ‘목구멍과 혀(喉舌)’, ‘귀와 눈(耳目)’, ‘지혜집단(智库)’, ‘정보집결지(信息总汇)’라고 지칭된다.

중국과 러시아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같이한 역사 등을 공유하는 특수한 관계이다. 위에서 소련 언론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신문∙통신사 이야기를 통해 두나라의 공통점을 살펴 보았다. 우리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과 일본에 대한 관심과 교류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관심과 교류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시장경제를 운위하는 러시아, 중국과 교역하며 상호 이익을 추구해 오고 있다. 시장이 협소한 한국으로서는 지역적으로도 붙어 있고 소비자의 규모도 큰 두 나라와의 경제적 거래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한 현대의 디지털 경제와 글로벌 교역이라는 두가지 테마만으로도 우리 젊은이들이 중국, 러시아 시장을 포함한 세계로 활동 범위를 넓힐 동인이 된다. 더구나 동북아의 정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될수록 육로로 연결된 경제권은 활성화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광의의 중국어권 시장과 러시아어권 시장도 함께 묶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 필자 오강돈은...

《중국시장과 소비자》(쌤앤파커스, 2013) 저자. (주)제일기획에 입사하여 하이트맥주∙GM∙CJ의 국내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등 다수의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이후 디자인기업∙IT투자기업 경영을 거쳐 제일기획에 재입사하여 삼성휴대폰 글로벌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 등을 집행했고, 상하이∙키예프 법인장을 지냈다. 화장품기업의 중국 생산 거점을 만들고 판매, 사업을 총괄했다. 한중마케팅(주)를 창립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졸업, 노스웨스턴대 연수, 상하이외대 매체전파학 석사.

오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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