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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궁지에 몰린 이란의 하메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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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새해 벽두에 별안간 공격용 무인기(드론) 한 대가 발진했습니다. ‘침묵의 암살자’라 불리는 미국의 드론 ‘MQ-9’입니다. 이 드론의 공격으로 가셈 솔레이마니가 사망했습니다. 22년간 이란 혁명수비대의 핵심 조직을 이끈 인물입니다.

테러 조직도 아닌 정상 국가의 군 최고위 실세를 노린 공격은 이례적입니다. 이란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복수’를 외쳤습니다. 이란은 이라크에 있는 미군 부대에 미사일 수십 발을 쏘는 반격을 함으로써 1라운드 공방을 마쳤습니다.

2라운드는 욕설 공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사진)는 금요 대예배를 열고 “솔레이마니 암살은 미국의 수치”라며 “미국인 광대들은 이란 국민을 지지하는 척하지만 이란인을 배신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광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칭한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그러자 트럼프가 반격에 나섰습니다. 그는 17일(현지 시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최근 그리 최고가 아닌 이란의 ‘최고지도자’라 불리는 사람이 미국과 유럽에 대해 형편없는 발언을 했다”면서 “그는 매우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과 이란의 악연은 19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이란 혁명 최고지도자 호메이니(1902∼1989)는 친미(親美) 성향의 왕조를 몰아내고 이슬람 시아파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인 이란은 1926년 팔레비 왕조 이래 미국의 영향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추구했던 대표적 친미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경제 위기와 왕정 부패로 1979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납니다. 왕은 미국으로 도망가고 추방됐던 이슬람교 지도자 호메이니가 돌아와 이슬람 혁명을 완성했습니다.

그해 11월,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이 벌어지며 미국과 이란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닫게 됩니다. 이란 혁명군이 미국으로 피신한 왕을 되돌려 달라며 미국 외교관과 민간인 52명을 무려 444일간 억류했던 겁니다. 1980년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이라크 편에서 싸웁니다. 당시 8년간의 전쟁을 버텨내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솔레이마니입니다.

트럼프는 중동 지역에서 시아파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는 현상의 중심에 솔레이마니가 있다고 봤습니다. 미국은 솔레이마니의 이란 혁명수비대 산하 특수부대인 ‘쿠드스’가 시아파 무장조직의 배후라고 지목하기도 했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군, 팔레스타인 하마스 등이 대표적입니다.

‘피의 복수’를 다짐한 이란의 결집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란은 10일 우크라이나 민간 여객기를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로 잘못 알고 격추하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하메네이가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결전의 동력도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동안 최악의 경제 상황과 국내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란 국민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반정부 시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하메네이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위를 주도하는 이란 혁명 이후 세대는 이념보다 실리를 중시하면서 경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하메네이가 궁지에 몰리는 모양새입니다.

중동 정세가 예측 불허의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우리도 군대를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하는 문제를 두고 긴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21일 한시적으로 청해부대의 작전 지역을 기존 아덴만에서 일부 확대하는 방식으로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박인호 한국용인외대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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