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조선 총독’ 소동으로
권력집단의 反美가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들이 총선에서 이기면 현실이 될 것이다
선우정 부국장 |
2차대전 종전 직후 한반도의 일본인 이야기를 담은 책 ‘조선을 떠나며’엔 조선총독의 위세를 알 수 있는 일화가 나온다. 일제의 항복 선언 다음 날 조선총독부가 부산교통국에 긴급 지시를 내렸다. 총독 아내를 일본으로 피신시킬 배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하루 뒤 총독 아내가 부산에 도착해 배를 탔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배가 부산 앞바다에서 휘청 기울었다. 총독 아내가 바리바리 배에 실은 재물의 무게 탓이었다. 부임한 지 일 년 남짓. 남편인 총독이 조선에서 긁어모은 재물은 배를 뒤집을 만큼 거대했다. 아내는 재물 절반 이상을 바다에 던지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일본 사람들은 조선총독을 "소(小) 천황"이라고 불렀다. 조선 땅에서 전제적인 권력을 누렸기 때문이다. 총독은 조선의 행정·입법·사법권을 장악했다. '천황에 직예(直隸·직속)한다'는 규정에 따라 일본 정부와 의회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대만의 총독이나 만주의 관동도독(都督)에겐 허락하지 않은 특별한 권력이었다. 대륙의 교두보로서 조선의 특수성이 예외적 권력을 만들었다. 조선총독은 권력을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정치적 미래도 보장받았다. 총독을 지낸 8명 중 3명이 총리에 올랐다. 부산 앞바다에서 가족 추태를 연출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총리를 지낸 후에 총독에 올랐다.
한국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총독 지배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은 사실상 한반도의 왕이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총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고 조선총독으로부터 한반도를 해방하고 주권을 빼앗아 한국인에게 돌려준 나라는 미국이다. 초등학생도 아는 뻔한 상식을 구태여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한국의 권력 집단에 이 상식이 상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지금 여권에 속하는 주사파 출신 정치인이 8·15를 '승전일(勝戰日)'로 부르자고 했다. 한국은 승전국이고 1945년 8월 15일은 승전일이라는 것이다. 일제와 싸워 이겨 나라를 찾았다니 얼마나 기분 좋은가.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주장은 판타지일 뿐 역사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의 대일(對日) 승전에 의해 해방됐고 해방 후 승전국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기분 나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판타지를 역사라고 사기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의 자긍심을 위해서? 한국 현대사를 악의 시대로 왜곡하고 인식하는 집단이 그럴 리 없다. 그들은 한국사에서 두 가지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그동안 몸부림쳤다.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가치와 미국에 의한 한반도의 해방이다. '승전일' 같은 달콤한 판타지를 동원해 해방자 위치에서 미국을 도려낸다. 그리고 현대사의 온갖 비극에 미국을 갖다 붙여 해방자가 아닌 약탈적 지배자로 만든다. 일본 제국주의를 미국 제국주의로 바꿔치는 것이며, 역사를 환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승전일 주장으로 호응을 얻은 인물은 역사를 농락하듯 여자를 대했다가 감방에 간 안희정씨다. 1980년대 그가 속한 주사파 조직은 "미제(美帝)의 각을 뜨자"라는 노래를 불렀다. '삼팔륙' '사팔륙' '오팔륙'을 거쳐 요즘 '×팔륙'으로 불리는 이 집단의 특징은 판타지를 동원해 국민의 기억을 조작하고 혓바닥으로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폭력 전과를 민주 전과로 둔갑시킨 유시민씨가 조국씨 가족의 PC 도둑질을 "증거 보존"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리스 미 대사에 대해 "내정 간섭을 했다"며 '조선총독'에 비유하는 인물들도 여기에 속하거나 인식을 공유한다. 중국 대사가 사드 이슈에서 실제로 내정을 간섭했을 땐 방관하던 이들이다.
미국은 일제로부터 한국을 구한 해방자다. 전쟁에서 한국을 구했다. 한국이 원해서 미군을 한국에 뒀다. 한국 발전의 최대 조력자다. 미국은 한국을 무단 통치하지 않았다. 출세를 원하는 대사를 한국에 보낸 적도 없다. 아내에게 한재산 들려 보낸 대사도 없다. 미국은 대사가 칼을 맞아도 직분을 다하도록 했다. 집이 털리고 인종적 모욕을 당해도 직분을 완수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뻔한 사실을 다시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의 권력 집단이 원시적 민족 감정과 판타지를 동원해 국민 기억과 상식을 조작하는 '×팔륙 주사파'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이 정권이 최종 국면에서 ‘반미(反美)’를 내세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조선총독’ 소동은 걱정이 현실로 변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현실이 될 것이다.
[선우정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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