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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영화화된 굴곡진 삶과 음악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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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개봉 다큐 ‘에릭 클랩튼…’]

로큰롤 ‘명예의 전당’ 3차례 입성한

위대한 기타리스트의 삶과 음악

25년 지기 감독 통해 처음 영화화

주인공이 영화 내레이션 직접 맡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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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하기만 한 길을 걸은 음악가가 어딨겠냐만은, 기타리스트 겸 가수 에릭 클랩턴만큼 극적인 삶을 산 이도 흔치 않다. 그의 삶과 음악 세계를 다룬 첫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다. 23일 개봉하는 <에릭 클랩튼: 기타의 신>이다.

영화 부제처럼 클랩턴은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최초로 세 차례 입성(밴드 야드버즈·크림 멤버와 솔로 아티스트로 각각 한 번씩), 그래미상 총 18차례 수상, <롤링 스톤> 선정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인’ 2위 등 화려한 기록들이 수식어로 따라다닌다. 1960년대 중반 영국 런던 이즐링턴역 주변에서 발견된 “클랩턴 이즈 갓”(클랩턴은 신이다)이라는 낙서는 미국 뉴욕으로까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영화는 클랩턴의 위대한 음악적 성취를 따라가면서 그 이면에 숨은 인간적 아픔 또한 비춘다.

1945년 영국에서 태어난 클랩턴은 뛰어난 미술 재능으로 킹스턴 예술학교에 입학했지만, 얼마 안 가 학업을 그만두고 기타 연주에 매진한다. 어릴 적부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블루스 음악에 심취했던 그에게 기타는 친구이자 가족이나 다름없다. 1963년 블루스 성향이 짙은 록밴드 야드버즈에 합류한 그는 믹 재거가 이끄는 롤링스톤스와 경쟁하며 영국 록 전성기를 이끈다. 야드버즈가 팝으로 음악 노선을 변경하자 그는 밴드를 나온다. 이후 ‘존 메이올스 블루스 브레이커스’를 거쳐 1966년 잭 브루스(베이스), 진저 베이커(드럼)와 함께 3인조 밴드 ‘크림’을 결성한다. 크림으로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지만 멤버 간 불화로 2년 만에 해체한다. 이후에도 여러 밴드를 거친 뒤 솔로 아티스트로 자리 잡은 그는 지금까지도 월드투어를 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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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음악 인생의 뒷면에는 결핍과 고통이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인 줄 알았던 분들이 실은 외조부모였으며, 자신을 버리고 캐나다로 갔던 친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들로 인정받지 못한 비극적 가족사는 그에게 자기 파괴적 분노와 세상을 향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를 힘겹게 했다. 어렵게 한 고백이 거절당하자 그는 약물과 알코올중독에 빠져 허우적댔다. 나중에 패티 보이드와 결혼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코너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얻는 듯했다. 하지만 4살 아들이 고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인생 최악의 슬픔에 빠진다. 다시 약물이나 알코올중독의 나락에 빠질 뻔한 그를 구원한 건 음악이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난 버려뒀던 스패니시 기타를 꺼내 늘 지니고 다녔어요. 음악이 날 구했어요.” 그는 슬픔을 승화한 곡 ‘티어스 인 헤븐'을 발표했고, 이 노래로 1993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반' 등 6관왕에 올랐다.

클랩턴은 영화에서 직접 내레이션을 맡았다. 이전까지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 제안을 늘 거절해왔으나, 25년 지기 친구인 릴리 피니 재넉 감독에게 처음 허락했다고 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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