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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전성인의 경제노트]조디 포스터와 이재용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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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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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 포스터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골든 글로브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긴 1988년의 대표작이 <피고인:(The Accused>이다. 이 영화에서 조디 포스터가 연기한 여주인공 사라는 짧은 치마를 입고 바에서 유혹적인 춤을 추다가 불행하게도 집단 성폭행을 당한다. 영화는 그 재판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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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집단 성폭행 정황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관건은 해석이었다. 범죄자가 잘못한 것도 일부 있지만, 젊은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바에서 유혹적인 춤을 추었으니 여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정숙한 여자라면 단정한 옷을 입었을 것이고, 그런 유혹적인 춤을 추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교묘하게도 가해자에 대한 약간의 억울함과 그에 따른 면책의 논거가 되기도 하였다.

내가 30년도 넘은 이 영화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정확히 이런 어처구니없는 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한 고법 파기환송심이다.

이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정모 부장판사는 작년 말에 있었던 제1차 공판에서 느닷없이 삼성그룹이 준법감시제도를 갖출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래야 이런 범죄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말은 맞다. 그러나 과연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가 해야 할 말인지 고개가 갸우뚱했다. 그래도 넘어갔다. 왜냐하면 정 판사가 준법감시제도 설치는 재판의 결과와 무관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월17일의 제4차 공판에서 우려했던 문제가 터졌다. 정 판사가 삼성이 설치한 준법감시위원회를 양형에 참작할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거론한 것이 요새 한참 언론에 오르내리는 미국의 ‘연방양형기준 제8장’(이하 ‘제8장’)의 제도였다. 거기에 마치 ‘죄를 저지른 총수가 나중에 준법감시위원회 잘 만들면 죄를 감경’해 주는 제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완전한 허위다. 제8장에는 그런 말 자체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그 반대다. 왜 그럴까?

우선 제8장의 제도는 자연인의 양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조직 즉 법인의 양형에 관한 것이다. 법인에는 벌금형을 부과할 뿐인데 이때 법인의 벌금형 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제8장의 내용이다. 자연인 개인의 양형에 관한 조항은 제3장부터 제5장에 걸쳐 있는데 여기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준법감시제도를 만들면 자연인의 죄를 깎아 준다는 조항이 없다. 의심스러운 독자는 미국 연방양형위원회 홈페이지(https://www.ussc.gov)에서 2018년 매뉴얼을 다운받아서 ‘compliance’라는 문자열을 검색해 보기 바란다.

둘째, 이재용처럼 큰 회사의 최고 의사결정자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준법감시위원회는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모든 준법감시 조직은 문제가 생기면 회사의 대표자에게 보고하도록 돼 있다. 즉 회사의 최고 의사결정자는 준법감시제도를 유효하게 운영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런데 그 책임자가 사고를 쳤다면 준법감시조직이 아무리 잘 만들어진들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그래서 최고 의사결정자의 불법이 문제가 된 경우에는 이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

셋째, 제8장은 (피고인 법인이) 범죄행위를 저지르던 그때에 유효하게 작동하던 준법감시조직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지, 범죄 다 저지르고 유죄 다 확정된 뒤에 형량 판단하는 단계에서 재판부의 요구로 급조한 준법감시조직을 근거로 형량을 감경시켜준다는 말이 아니다.

넷째, 더구나 삼성전자 등 삼성의 계열사들은 굳이 따지자면 이 사건의 피해자다. 이재용 부회장이 회삿돈을 횡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회장이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정 판사는 이재용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인 삼성전자 등 계열사가 무엇을 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을 하면 이제 더 이상 이런 ‘불행한 범죄’가 없을 것이니 이 부회장의 형량을 깎아 줄 수도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이번 재판과 조디 포스터 영화의 유사점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조디 포스터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여자가 짧은 치마 입고 그딴 식으로 춤을 추니까 문제가 생기지. 이제 여자 너도 긴 치마 입고 조신하게 행동해. 그럼 앞으로 이런 범죄가 발생할 개연성은 확 줄어들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 범인들 감형해 줄게. 이의 없지?” 이런 말을 들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뻗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 판사 주장이 딱 그거다. ‘삼성에 준법감시제도가 제대로 없어 이런 일이 발생했다. 이제 그것을 잘 갖추면 아무리 총수가 나쁜 맘을 먹어도 범죄가 발생할 개연성은 확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부회장을 감형해 줄게. 됐지?’

이게 말이 되는가? 자기 승계 문제 때문에 부당한 합병 비율로 삼성물산을 합병하고, 이 과정이 잘 굴러가게 하려고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에게 회삿돈을 빼돌려 뇌물을 준 사람에게 이런 논리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삼성의 주요 계열사들은 모두 상장회사나 금융회사들이라 이미 준법감시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범죄가 발생한 핵심적 이유는 준법감시제도가 잘못 설계된 탓이 아니라, 총수가 연루된 범죄여서 준법감시제도로는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회사 최고경영자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엔 사실상 많은 예방제도가 무효하다는 것이다. 미국 연방양형기준이 최고경영자를 엄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에 따르면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여야 한다. 정 판사의 지금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의한 것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이것이 법관의 양심인 것인가? 나는 이 사건의 공소 유지를 맡고 있는 특검이 공정한 재판을 보장받을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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