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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중고로 산 가전제품 반납하라니"... '내 구제대출' 피해 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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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온라인에서 새 가전제품을 저렴하게 구매했다가 뒤늦게 렌탈제품인 것이 확인돼 피해를 입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제품들은 대부분 ‘내 구제대출(나를 구제해주는 대출)’이라는 불법대출을 통해 판매되는 제품이다. 불법대출 일당은 대출자 명의로 고가의 가전제품을 렌탈한 뒤 구매자에게 시세보다 저렴하게 판매해 돈을 챙긴다. 구매자에게 제품 대금을 받고 잠적하거나, 대출자에게 대출금을 주지 않은 사례도 있다.

지난해 9월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인 중고나라에서 한 가전제품 전문 판매자에게 300만원 상당의 냉장고를 구매한 김모(서울 중구·43)씨는 최근 가전제품 렌탈 업체로부터 제품을 반납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씨는 중고나라 판매자에게 돈을 주고 구매한 정상 제품이라고 설명했으나, 렌탈 업체는 "판매자가 다른 사람 명의로 제품을 렌탈한 뒤 구매자에게 되판 것"이라고 했다. 이 업체는 계약자가 렌탈비를 내지 않아 추심을 진행 중이고, 냉장고를 설치받은 김씨에게 제품 반납을 요구하기 위해 전화한 것이라고 했다.

이 업체는 김씨에게 "렌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고, 이를 알고도 구매했다면 공범에 해당한다"고 으름장을 놨다. 김씨는 결국 제품 판매자를 경찰에 고소했다. 김씨는 자신이 구매한 냉장고가 ‘가전 내 구제대출(나를 구제해주는 대출)’이라는 신종 불법대출을 통해 판매된 제품이라는 것을 경찰의 설명을 듣고 알게 됐다.

경찰 관계자는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신제품을 시세보다 20~30% 저렴하게 파는 경우는 모두 내 구제대출 제품으로 봐도 된다"며 "최근 이런 피해 사례가 계속 증가해 소비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고 했다.

경찰이 파악한 가전 내 구제대출 수법은 이렇다. 대출 모집책은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소셜미디어(SNS)에 광고를 올린다. 이들은 가전제품을 렌탈하면 건당 수백만원의 대출이 가능하다고 광고한다. 판매책은 중고나라나 번개장터와 같은 인터넷 거래 사이트에 가전제품 판매 글을 올린다. 보통 시세보다 20~30% 저렴하지만, 제품 설치까지 4~8주가 걸린다. 내 구제대출을 받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야 가전제품을 렌탈해 구매자에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출 모집책은 내 구제대출 신청자 명의로 렌탈업체로부터 가전제품을 렌탈한다. 이후 구매자에게 받은 제품 대금 일부를 대출자에게 내준다. 대출자는 이자 대신 매달 렌탈비를 내면 된다. 판매책은 렌탈 제품을 구매자의 집에 설치한다. 구매자는 자신이 구매한 가전제품이 렌탈제품인 것을 모르고 사용하는 것이다. 내 구제대출은 신용도가 낮고 금융권을 이용할 수 없는 청년들이 주로 이용한다.

조선일보

실제 ‘가전 내구제대출’ 제품 판매자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가전 내 구제대출은 최근 1~2년 사이 등장한 신·변종 대출이다. 과거엔 주로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본인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한 뒤 업자에게 넘겨주고 돈을 받는 방식이었다. 주로 50만~60만원 사이의 소액대출 위주였다. 그러다 최근 가전제품이 점점 고급화되고 가전제품 렌탈시장이 커지면서 신종 불법대출이 생겨난 것이다. 고급 가전제품은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천만원이 넘는 제품도 있어 가전 내 구제대출을 이용하면 한번에 수백만원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가전 내 구제대출은 대출자와 제품 구매자 모두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된다. 우선 대출자가 렌탈비를 연체할 경우 대출자와 구매자 모두 문제가 복잡해진다. 렌탈업체는 계약자에게 렌탈비 납부를 독촉하고, 실제 제품을 설치받은 구매자에게 제품 반납을 요구한다. 만약 체납 렌탈비를 계속 지급하지 않을 경우 렌탈업체는 연체채권을 추심업체에 넘긴다. 대출자는 물론 렌탈제품인 것을 모르고 제품을 구매한 구매자도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다.

렌탈 기간이 끝나는 경우도 문제다. 대여 기간이 끝나면 계약자는 잔금을 주고 제품을 아예 구입하거나 제품을 렌탈 업체에 반납해야 한다. 구매자는 수백만원을 주고 구매한 제품을 몇년 후 렌탈업체에 반납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경찰은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내 구제대출 피해자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렇게 판매된 내 구제대출 제품은 렌탈 기간이 끝나거나 렌탈비가 연체될 때까지 구매자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다"며 "제품을 조금 저렴하게 구매하려다가 일종의 시한폭탄을 떠안는 셈"이라고 했다.

금융당국도 온라인을 이용한 각종 신·변종 자금공급 행위와 관련해 관계부처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최근 대법원은 이런 편법대출이 이자와 상환 기한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업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대부업법을 통해 이런 거래를 단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대부업법 위반이 아니더라도 거래에 따라 여타 금융법과 관계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며 적극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실물거래가 이뤄지는 가전 내 구제대출의 경우 대부업법 위반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신용결제수단을 활용해 재화 등을 구입하도록 한 뒤 할인매입하는 경우로 볼 수 있어 여신전문금융업법과 정통망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법망을 피해가는 신종 영업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제도 보완 및 단속 방식 다변화 등을 통해 대응할 예정"이라고 했다.

[송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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