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2 (일)

이슈 종교계 이모저모

하나의 성, 하나의 종교를 고집해 우리는 세계를 잃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일보

지난 12일 인도령 카슈미르의 스리나가르 시내에서 인도 준군사조직 소속 군인이 병사가 거리를 지나가는 무슬림 카슈미르 주민들을 바라보고 있다. 카슈미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한 지역으로 꼽힌다. 스리나가르=A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북부에 위치한 카슈미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삼엄한 분쟁지로 꼽히는 곳이다. 카슈미르의 비극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교도가 절대 다수였던 주민들이 파키스탄을 택했음에도 국민투표를 전제로 인도로 편입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카슈미르 지역의 분리 독립운동은 50년이 넘게 이어지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카슈미르뿐만 아니다.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간의 종교전쟁, 인도ㆍ파키스탄간의 영토 갈등은 현재까지도 인도 전역에서 이어지며 대륙을 인도인들의 피와 눈물로 물들이고 있다.

아룬다티 로이의 장편소설 ‘지복의 성자’는 바로 이 피와 눈물에 바치는 송가와 같은 작품이다. 1997년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로이가 20년 만에 내는 신작이다. 부커상 수상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로이는 이후 소설가보다는 사회운동가로 더욱 활발히 활동했다. 인도의 핵실험과 정치부패, 힌두 극단주의를 고발하는 다수의 논픽션을 쓰며 정치, 인권, 환경 운동가로 각종 이슈에 목소리를 내왔다. ‘지복의 성자’는 이러한 로이의 20년 간의 이력이 문학으로 승화된 작품이다. 증오와 폭력으로 상처 입은 인도를 어루만지는 작가의 손길은 이전 작품보다 한층 섬세해졌다.
한국일보

아룬다티 로이 ⓒMayank Austen Soofi. 문학동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지탱하는 첫 번째 축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제3의 성, 힌두어로는 ‘히즈라’로 불리는 안줌이라는 인물이다. 참고로 2014년 인도 정부는 자신의 신체 조건과는 다른 성적 정체성을 느끼는 ‘히즈라’를 ‘제3의 성’으로 명명하며 이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여성과 남성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안줌은 자신을 남자로 키우려는 주변의 설득을 물리치고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콰브가’로 들어간다. ‘꿈의 집’을 뜻하는 콰브가에서 히즈라는 여성이 되기를 택한다.

사원 계단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엄마로서의 소망까지 실현시켜나가던 안줌은 아픈 아이의 복을 빌러 떠나던 중 구자라트 지역을 경유하게 된다. 그곳에서 실제 인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종교 폭동으로 꼽히는 ‘구자라트 폭동’(2002)을 겪게 된다.

3개월 간 2,000여명의 이슬람 교도가 살해되고 수 천명의 여성이 강간당한 이 사건에서 안줌은 ‘히즈라’라는 이유로 살아남는다. 집으로 돌아온 안줌은 자신의 삶이 다만 ‘학살자들의 행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을의 허름한 공동묘지로 거처를 옮긴다. 안줌이 터를 잡은 그곳에는 점점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이 모여든다. 장례식장에서 거부당한 매춘 여성의 장례를 대신 치러준 것을 계기로, 안줌의 둥지는 이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삶과 죽음을 모두 의탁하는 안식처가 된다.
한국일보

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ㆍ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588쪽ㆍ1만6,500원

안줌이 소설의 전반부를 담당한다면, 후반부는 ‘틸로’라는 여성 인물과, 그녀를 사랑한 세 남자들과의 뒤엉킨 운명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1984년 대학교 연극연습에서 만난 이들은 1996년, 분리독립운동으로 들끓던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 정보국의 고위 공무원과 언론인, 정부군에 맞서는 게릴라 전사로 재회하게 된다.

운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선 틸로의 이야기는, 어느 혼잡한 광장에서 안줌의 이야기와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시위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델리의 광장에 버려진 갓난아이가 발견되고 시위를 구경나왔던 안줌은 아이를 경찰에 데려가겠다는 사람들에 맞선다. 안줌과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아이는 사라지고, 얼마 뒤 사라졌던 아이를 품에 안은 틸로가 안줌의 묘지로 찾아오면서, 소설은 비로소 거대한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

제목이 된 ‘지복의 성자’는 페르시아 출신의 17세기 성인 ‘하즈라트 사르마드’를 일컫는다.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 들었으며, 힌두교도인 소년과 동성애를 나눴던 그는 소설 전체를 함축하는 상징과 같다. 하나의 종교만을 받들라는 억압에 맞섰고,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소년에 대한 사랑의 시를 읊은 사르마드. 그는 하나의 성별과,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종교만을 인정하는 인도를 향한 작가의 질문을 대신하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이것이 20년만에 돌아온 거장이 우리에게 내놓은 답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