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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이슈 미술의 세계

중국 현대 미술의 대사(大師), 우관중(吳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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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봄은 어디로 가는지`(1999), 마포에 유화, 100*148㎝, 상하이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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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 미술기행-35] 2010년 6월 25일, 우관중은 91세로 타계했다. 중국의 모든 매체가 연일 뉴스를 보도하는 가운데 '이 나라에 더 이상 대사(大師)가 존재하는가?'라는 공개적인 탄식은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대변한다.

1919년 중국 장쑤성(江蘇省)에서 태어난 우관중은 공학도였으나 벗 주더췬(朱德群)을 만나 미의 세계에 눈을 뜬 뒤 주저함 없이 미술학교 항저우예전(杭州藝專)에 입학했다. 20세기 전반기 중국 미술의 중심 인물 린펑?x(林風眠)과 판톈서우(潘天壽)에게서 서구 모더니즘과 중국 전통 회화를 익힐 수 있었다. 당시 항저우예전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다. 졸업 후인 1947년 전국에서 단 한 명뿐인 국비생 신분으로 당대 세계 미술의 중심 도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중국 대륙은 본격적인 혁명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중국의 서양 미술 뿌리는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중국 영남(嶺南) 지역, 광둥성 수도 항구 도시 광저우에는 서양 기법과 재료를 이용해 서양화를 그려 외국인들에게 파는 중국인들이 있었다. 족자 그림만 그리던 화가들은 서양 화가들과 유화가 상선을 따라 광저우에 들어오면서 수채화와 같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남중국의 인문 풍격이 담긴 그림들은 서양인의 심미안을 자극했다. 19세기 초에는 종사자들이 2000~3000명에 달했다. 수출용 그림이 100년 동안이나 번성했지만 갑부들인 광저우 13행의 몰락과 사진 기술 발달로 명맥이 끊어지면서 중국에서 서양 미술은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우관중은 파리 고등미술학교 교수인 수베르비에 밑에서 회화의 순수 형식과 언어 문제를 파고들었다. 수베르비에는 주관적 색채와 형태를 강조하는 추상 화가다. 졸업 전 이미 살롱전에 두 차례나 입선한 우관중은 3년여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파리에 남아 화업을 지속할까 고민했으나 고흐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보리잖아. 네가 있을 곳은 보리밭이야. 고향 땅에 심어야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지. 파리의 보도(步道)에서 말라죽지는 마."

베이징에서 만난 동창의 소개로 쉬베이훙(徐悲鴻·1895~1953)이 원장인 중앙미술학원의 강사가 되었으나, 학벌도 없는 목수 출신의 치바이스(齊白石·1860~1957)를 교수로 발탁한 쉬베이훙에게 우관중은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우관중은 유럽 최신 미술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려 했지만, 장제스의 국부군을 쫓아내고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대륙은 러시아 사회주의 극사실 화가 일리야드 레핀을 알지 못하는 그를 배척했다. 학교에 재직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문예정풍'이 시작되었다. 쉐베이훙은 "자연주의는 나태함이므로 타도해야 하고, 형식주의는 소멸시켜야 한다"고 했다.

우관중의 그림은 '공농병(工農兵) 계급을 추하게 묘사한' 형식주의 예술로 호도되었다. 칭화대학 건축학과와 베이징예술학원 등으로 좌천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법과 화풍을 개발하고 발견했다. 주변에서 계급적 시각으로 보는 인물화를 피하고 풍경화에 주력했다. 끈적끈적한 안료와 둔탁한 브러시를 사용하는 유화와 생동감 있고 율동적인 중국 산수화의 이미지를 버무렸다. 풍경화 속 '나이프 기법'으로 나무를 그렸다. 티베트 스케치 여행 중 기차로 지나가면서 본 풍경과 역에서 내려 그 장소를 찾아간 풍경은 달랐다. 기차에서 보고 느낀 감동은 빠른 속도로 압축된 변형된 공간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부터 현장이사 스케치라는 화면 구성법에 몰두했다. 열악한 숙식, 험난한 환경을 감내하는 여행은 고행이었지만, 자신의 예술 신념을 이어나갔다.

베이징예술학원의 해체로 중앙공예미술학원(현 칭화대 미술대학)으로 옮긴 1966년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 문화대혁명의 어둠이 내렸다. 한편으로 지식분자들을 이용해 농촌 간부들의 네 가지 부패를 청산한다는 사청(四淸)운동이 시작되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얻은 간염은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심한 우울증을 유발했다. 마오쩌뚱 시대에는 하나의 태양(마오쩌뚱)과 한 가지 꽃, 즉 해바라기(인민)만 존재했다.

우관중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훼멸해야 했다. 급기야 창작 금지령이 내려졌다. 재교육 대상이 되어 병든 몸으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극심한 치질까지 앓았다. 걷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비교적 가벼운 일터로 옮길 수 있었다.

몇 년 후 창작 금지령이 해제되었으나 병세는 여전했고 그는 차라리 '그림으로 죽으리라' 결심하며 또다시 붓을 들었다. 1972년 시골에서 쓰는 분뇨 지게를 이젤로 삼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처가가 있는 구이양(貴陽)에서 건강을 회복했다.

1978년 마오쩌둥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우관중 작품도 새로운 평가를 받아 1979년 보수 제도권의 상징인 베이징의 중국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웬만한 이론가의 논리력과 필력을 넘어서 '회화의 형식미'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추상미에 관하여' 등의 글을 통해 제도권 창작 이념에 도전했고, 자신의 복권된 지위를 활용해 젊은이들의 창작과 연구를 이끌고 지원했다.

이 시기 평생의 대표작으로 꼽는 '제비 한쌍'(1981)을 제작했다. 고향 장쑤성 지역의 독특한 풍경을 시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화면으로 표현했다. 흰 회벽에 까만 지붕의 가옥들, 구름이 끼어 음영이 확실치 않은 평면적이고 모호한 분위기의 날씨 등을 추상미를 강조한 형식으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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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한 쌍`(1981 ), 화선지 수묵채색, 70*140㎝, 홍콩예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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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홍콩 전시를 시작으로 유럽, 미국, 아시아의 수많은 전시에 초청되었다. 문화대혁명 후 진톈(今天), 싱싱화후이(星星畵會) 같은 안티 마오이즘의 시인, 예술가 집단을 만든 황루이(黃銳·1952~ )를 비롯해 저우춘야(周春芽), 마오쉬후이(毛旭輝), 장샤오강(張曉剛) 등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들은 자신들의 예술적 토대로 우관중을 꼽는다.

우관중의 작품 세계는 현대적 감각을 추구하되 농촌의 필부까지 공감하는 예술을 추구했고, 추상과 구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양식으로 유화와 중국화 양쪽 모두 일가를 이뤘다는 평가이다.

[심정택 작가]

※참고자료 : '이슈, 중국 현대 미술' 이보연, '중국 현대 아트' 마키 요이치(牧陽一), '제국의 상점' 이궈룽, '광저우 이야기' 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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