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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이국땅 떠돌던 조선 국새 서양인 이름 새겨져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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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만든 효종의 어보도 함께 환수

소장해온 재미교포 최근 기증 뜻 밝혀

국새엔 서양인 소유자 이름도 새겨져

22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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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5월23일, 재위 19년을 맞은 고종은 나라를 대표하는 도장인 ‘국새’를 잇따라 만들라고 중신들에게 명령했다. 왕의 채근에 한달여 만에 국새 3점이 제작됐다. 각각 ‘대군주보’(大君主寶),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대조선대군주보’(大朝鮮大君主寶) 등 장대한 명칭이 붙었다.

당시 막 서른을 넘긴 고종은 자신만만했다. 명을 내리기 전날인 5월22일 서구 나라 중 처음으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왕조는 서구 열강과의 외교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 고종은 수백년 군림해온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들과 폭넓게 자주외교를 하고 싶었다. 이런 열망을 담아 1882년 7월초 완성된 국새 3점은 왕국의 상징물로서 서구 나라들과의 조약 비준문 같은 외교문서와 다른 공문서에까지 숱하게 사용됐다. 하지만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따로 국새를 만들면서 용도가 줄었고, 30년도 못 가 한일병합으로 나라가 망하자 3종의 국새는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때 그 국새’ 가운데 하나가 새해 나타났다. 문화재청은 국새 ‘대군주보’와, 1740년 영조가 선왕 효종을 기려 만든 인장인 ‘효종어보’(孝宗御寶)를 지난해 12월 재미동포 사업가 이대수(84)씨에게서 기증받아 최근 환수했다고 19일 밝혔다. 국새가 국권의 상징물로 공문서에 쓰이는 도장이라면, 어보는 국왕 내외, 왕족의 덕을 기리거나 찬양하기 위한 의례용이다.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대군주보는 높이 7.9㎝ 길이 12.7㎝로 은으로 된 재질에 금도금을 했다. 거북 형상을 새긴 손잡이 ‘귀뉴’(龜紐)를 몸체인 인판(印板) 위에 붙인 모양새다. 몸체 뒷부분에 ‘W B. Tom’이라는 서양인 이름이 새겨진 것이 눈에 띈다. 국새가 미국에 유출될 당시 손에 넣었던 이가 소장품임을 알리려 새긴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1882년 고종 지시에 따라 외교업무용으로 만든 3종의 국새 중 하나가 확실하다”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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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400여년간 중국 황실에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새긴 국새를 받아 외교문서에 썼다. 이번에 환수한 국새 `대군주보’는 고종의 지시로 ‘조선국왕’ 국새가 아닌 ‘대(大)조선국’의 ‘대군주(大君主)’라는 글씨를 새긴 ‘대군주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하게 된 내력을 보여준다. 고종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등의 정세 변화에 호응해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를 끝내고 조선을 온전한 주권을 지닌 독립국으로 격상시키고자 노력한 산물로 볼 수 있다.

조선 왕실의 역대 인장을 연구해온 서준 국립고궁박물관 학예관은 “<조선왕조실록><일성록> 등 역사문헌의 세부 자료를 파악한 결과, ‘대군주보’의 공식적 사용 시기는 1882년 제작된 이래 1897년까지로 파악된다”고 짚었다. 이 기간중 외국과의 통상조약 업무를 맡는 전권대신을 임명한 문서(1883년)에서 실제 날인된 예를 찾아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대군주보가 외교문서 용도로만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새롭게 제정된 공문서 제도를 바탕으로 대군주(국왕) 명의로 반포되는 법률, 칙령, 조칙과 관원의 임명문서 등에 사용된 용례까지 폭넓게 확인된다는 것이다. 서 학예관은 “1870~80년대 고종은 외교용도로 국새 6종을 제작하게 했지만, 국가 권위를 지닌 국새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행정 공문서에도 널리 사용했음을 문헌 검색으로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효종어보는 높이 8.8㎝ 길이 12.6㎝로, 구리 재질에 금도금을 했고, 황색 거북 모양 손잡이(뉴)가 올려져 있다. 영조가 재위 16년째인 1740년 선왕 효종에게 ‘명의정덕’(明義正德)이라는 존호를 올리며 만들었다. 효종어보는 이번에 환수된 본 외에도 효종이 승하한 직후인 1659년 아들 현종이 시호를 올릴 때와 1900년 고종이 존호를 올렸을 때도 각각 제작해 봉안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기록에 보이는 효종어보 3점 가운데 지금껏 실물이 남아서 전해진 건 1900년에 만든 국립박물관 소장 어보가 유일했다. 나머지는 행방이 묘연한 실정이었으나, 이번 환수로 묻혔던 효종의 어보 하나를 추가로 찾은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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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와 어보는 재미동포 이씨가 1990년대 후반 경매사이트 등을 통해 사들여 소장해온 것들이다. 두 유물이 국외로 흘러나간 구체적인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씨는 지난 2014년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이 한·미 당국의 공조 수사 끝에 대거 환수됐고, 2017년에도 문정왕후와 현종의 어보가 미국에서 국내로 돌아가게 됐다는 소식을 언론 보도로 알게 된 뒤 기증하겠다는 뜻을 문화재청에 전했다고 한다. 그 뒤로 <미주현대불교> 발행인 김형근(64)씨와 아도모례원 성역화위원장 신영근(71) 씨가 나서 소통을 중개하는 구실을 하면서 환수작업이 진척됐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한 조선 왕조 500여년간 만든 국새와 어보는 모두 412점에 달한다. 이번에 돌아온 2점을 제외해도 국새 28점을 포함한 273점의 행방은 아직 모른다. 국새·어보는 조선 왕실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자, 정부의 공식 재산이어서 일반인들은 소장 행위 자체가 불법으로 간주된다. 사라진 273점의 조선왕실 인장류는 유네스코 123개 회원국을 비롯해 인터폴과 미국국토안보수사국 등이 공유하는 행방불명 유물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그동안 국새나 어보의 환수는 한국과 미국 당국의 압수, 수사와 같은 강제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적이 많았는데, 이번 환수는 3자의 도움을 받아 소유자 스스로 기증을 결심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대군주보와 효종어보는 22일부터 새달 8일까지 고궁박물관 2층 ‘조선의 국왕’실에서 일반 공개될 예정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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