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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봉준호 "마틴 스콜세지 `차기작 기다린다`고 편지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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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봉준호 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진촬영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오늘 아침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몇 시간 전에 읽었는데 저로선 영광이었고요. 그동안 수고했고, 이제는 쉬라고. 대신 조금만 쉬라고. 저의 차기작을 기다리신다고 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세계 영화계 최고의 상도 영화광(狂) 봉준호(51)를 바꿔놓진 못했다. 19일 진행된 기자회견 내내 그는 오스카 수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인상이 역력했지만, 스콜세지 감독에게 받은 한 통의 편지를 언급할 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9일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후 첫 수상 소감으로 "위대한 스콜세지"를 인용하며 팬심(心)을 드러내던 봉준호다웠다.

"제가 노동을 정말 많이 하는 사람이라 이번엔 좀 쉬어볼까 생각도 했는데요. 스콜세지 감독님이 쉬지 말라고 하셔서(웃음)"

이날 간담회는 서울시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렸다. 지난해 4월 '기생충' 제작보고회를 한 장소다. 봉 감독과 출연진, 제작진은 해당 보고회 이후 일어난 일들이 얼마나 '시의적절하게' 오스카 수상에 영향을 줬는지 털어놨다.

미국 전역을 달궜던 봉 감독의 "오스카는 로컬 시상식" 발언이 좋은 예다. 봉 감독은 화제가 된 것처럼 아카데미 측을 도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기자가 '왜 한국영화는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했느냐'고 질문하기에 그는 칸, 베니스 등 국제영화제와 오스카의 성격을 구분하려고 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제가 처음 오스카 캠페인 하면서 도발씩이나 하겠어요? 아카데미는 아무래도 미국 중심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미국 젊은 분들이 트위터에 많이 올렸나봐요."

회견장엔 미국, 일본,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의 기자가 몰려 '기생충'이 받고 있는 글로벌한 관심을 실감케 했다. CNN기자가 "'기생충'이 한국사회 불균형 다룬 영화인데 관객이 굉장히 열렬히 지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봉 감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항상 도발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는지도 몰라요. 본질적인 부분을 외면하는 건 싫었거든요. 이 영화엔 코미디 적인 부분도 있지만 빈부격차 같이 현대사회의 씁쓸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요. 처음부터 엔딩에 이르기까지 정면돌파하려고 만든 영화예요. 그 부분을 관객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영화에 당의정을 입혀서 달콤하게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이 영화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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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는 "칸영화제 때 내가 너무 과도하게 (포옹)하는 바람에 감독님 갈비뼈에 실금이 갔다라는 얘기가 있었다"며 "그래서 이번에는 감독 뒷목을 잡아가며 축하했다"고 밝혔다.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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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엔 불편한 질문도 따른다. 한국영화계는 사실상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등 스타 감독이 이끌어가는 시장일 뿐, 다른 감독에겐 좀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봉 감독 역시 그런 어두운 부분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젊은 감독들이 '플란다스의 개'(봉 감독 상업영화 입봉작), '기생충' 시나리오로 투자 받고, 촬영을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냉정하게 질문 해보면, 뭔가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엔 어려운 상황이 맞습니다. 2000년대 초에 제가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을 찍을 때만 해도 독립영화와 메인스트림(주류) 간 상호 침투, 좋은 의미에서 다이나믹한 충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영화가 20년 전 같은 활력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봉 감독은 산업차원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80~1990년대 큰 붐을 이뤘던 홍콩영화 인더스트리가 어떻게 쇠퇴해 갔는지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한국의 많은 사업가가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산업 차원에서 더 도전적인 이야기를 껴안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최근에 나오는 여러 훌륭한 독립 영화를 보면 워낙 많은 재능이 이곳저곳에서 꽃 피고 있기 때문에 결국엔 산업과의 좋은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생충' 신드롬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 HBO 드라마화를 위해 '빅쇼트' 감독 아담 매케이와 초기 작업 중이다. 봉 감독은 "오리지널 영화와 마찬가지로 블랙코미디, 범죄영화 형식을 띨 것"이라며 "다만, '설국열차' 드라마가 논의부터 방영까지 약 5년이 걸렸듯, 차근차근 준비를 잘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는 26일엔 흑백 버전도 영화관에 걸린다. 그는 "나는 클래식 영화에 대한 동경이 있다. 세상 모든 영화가 흑백이던 시절도 있었잖느냐"며 "내가 1930년대에 살고,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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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제작진과 출연진이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이 끝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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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장엔 봉 감독 외에도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한진원 작가, 양진모 편집감독, 송강호, 조여정, 박소담, 이선균 등 '기생충' 식구들이 함께했다. 할리우드 러브콜이 쏟아지지 않느냐는 물음에 송강호(53)는 "국내에서도 13개월째 일이 없다"며 웃었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공동수상한 한진원 작가(34)는 "시나리오는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며 "가사 도우미 이모님들, 아동학과 교수님들, 수행기사님 등 여러분이 취재에 도움을 주셔서 좋은 장면을 쓸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간담회를 마무리하는 한 마디를 부탁하자 봉 감독은 이 영화가 받은 여러 상 때문에 작품이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작년 5월 칸부터 이번 오스카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사가 있었죠. 영화사적 사건처럼 기억될 수밖에 없겠지만, 영화 자체가 기억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여기 있는 배우들이 보여준 한 순간의 멋진 연기, 제작진이 장인정신으로 만들어낸 장면 하나하나들, 그리고 그 장면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저의 고민들이요. 영화 자체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박창영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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