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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운현궁 雲峴宮-조선의 마지막 왕기가 서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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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운니동, 이 동네가 어디인지 잘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3호선 안국역에서 종로 세운상가 방면으로 발길을 잡으면 왼편에 자리 잡은 동네다. 오른편은 인사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운니동의 중심은 단연 운현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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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과는 성격과 규모가 다르다. 앞의 궁들은 왕의 집무실과 거처가 있는 조선 왕조 법궁이자 공식적인 궁이다. 이에 비해 운현궁은 규모도 작고 왕이 아닌 왕족의 사저다. 하지만 이곳은 고종이 12살 때까지 살던 잠저이자 고종 즉위 후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섭정한 고종의 생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집이었다. 더구나 고종은 즉위 후 가례(결혼식)도 왕궁이 아닌 운현궁에서 거행해,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해 친정하기까지 10여 년간 왕궁과 같은 권위를 지녔다. 흥선군은 안국동에 살았다. 하지만 그는 안동 김문의 세도 정치에 파락호 신세가 되었고 이를 한 번에 뒤집으려는 야망으로 1846년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느라 안국동 집을 정리하고 운니동에서 새 집을 마련했다. 1852년 고종이 되는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났다. 그리고 1863년 ‘강화도령’ 철종이 죽고 당시 궁의 최고 어른인 신정 왕후 조 대비가 명복을 순조의 장자인 익종의 양자로 입적해 왕위를 계승시켰다. 당시 고종의 나이 12세. 원래는 조 대비가 수렴청정해야 하지만 흥선군에게 권한을 위임해 흥선군은 살아 있는 왕의 생부로 대원군이 되어 고종의 권한을 대행했다. 운현궁은 조선 권력의 심장부가 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운현궁을 새로 단장했는데 담장 길이가 수 리였고 사가로는 드물게 4대문을 설치해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일본문화원 등도 원래 운현궁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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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1_위키피디아_Daderot, ©운현궁3_위키피디아_Lawinc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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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대문은 1990년대 초까지 안과 밖이 바뀐 채 달려 있었다고 한다. 권력을 상실한 대원군이 복권을 위해 움직이자 이를 막으려는 일본이 대원군을 자택 연금할 목적으로 대문을 바꿔 달아 안에서는 나갈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원군의 거처인 노안당老安堂이 나온다. 『논어』에 있는 ‘노자안지老者安之’에서 따온 것으로 ‘편안한 노후’를 소원했던 흥선군의 바램이 담긴 당호다. 안채는 ‘노락당老樂堂’이다. 고종이 명성 황후 민비를 맞은 곳이다. 운현궁의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며 궁궐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아마도 새 권부가 운현궁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제일 안쪽에는 고종의 생모인 부대부인 민씨의 거처인 ‘이로당二老堂’이 자리 잡고 있다. 부대부인은 노락당보다는 이곳을 주 거처로 삼았다. 노락당과는 회랑 같은 복도로 연결되어 그 규모가 남달랐다. 대원군은 자신의 집 당호에 ‘로老’ 자를 사용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잡은 권력의 영원성을 담은 듯하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다. 딱 10년 후 대원군이 탄 가마는 창덕궁에서 되돌려져 운현궁으로 향했다. 고종의 친정 선언과 더불어,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선택한 명성 황후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창덕궁의 대문이 열리지 않은 것이다. 대원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후 약 30여 년을 그는 노안당에 머물며 권력 무상과 청나라로의 압송, 일본의 가택 연금을 겪다가 며느리인 명성 황후가 시해되고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후 운현궁은 흥선군의 장남 흥친왕 이재면이, 또 장손 이준용이 대를 이었다. 이준용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그리고 이우의 장남 이청이 운현궁을 지켰다. 그 뒤 1991년 서울시에서 관리하면서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었다. 궁이면서도 궁이 아닌 독특한 성격의 운현궁. 이곳에는 쇠락해 가는 왕조와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려 한 흥선군의 야망이 녹아 있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위키피디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17호 (20.02.2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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