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새 대군주보'와 '효정어보'는 재미교포 이대수 씨의 기증으로 환수됐다. 19일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에서는 국새 1882년에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와 효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40년(영조 16년)에 제작한 '효종어보' 기증식이 열렸다.
|
이어 "그러던 중 이 유물을 한 경매장에서 매입하게 됐다. 경매장에서 매입하고 수집했을 때 한국에 반환하기로 했다"면서 "아직도 많은 국새와 어보가 (한국에)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안다. 국새와 어보의 소재지를 아는 분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알려주길 바란다"고 바랐다.
국새와 어보의 차이는 있다. 국새는 행정 업무에 사용되는 것이며 어보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으로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죽은 후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해 종묘신실에 봉안됐다. 세는 단위는 '과'다.
'대군주보'는 높이 7.9cm, 길이 12.7cm 크기로 은색의 거북이 모양 손잡이와 인판(도장 몸체)로 구성돼 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외교관련 업무를 위해 고종의 명에 따라 1882년 제작된 것으로 기록돼있다. 이전까지 조선은 명과 청에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국새를 받아 사용했으나 고조의 명으로 '대(大)조선국'의 '대군주'라는 글씨를 새긴 '대군주보를 새롭게 만들어 사용했다.
|
세부 자료 조사 결과 대군주보의 공식적인 사용 시기는 1882년 제작 이후 1897년까지로 파악된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해 '대조선국대군주보' 도장이 찍혀있고, 1882년 '조영통상비준서', 1884년 '조러통상조약'에도 쓰였다.
고종은 1897년 10월 11일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명나라 책봉 관계에서 태조가 명 사신에 보낸 2개 후보 중 하나였다. 고종은 독립국으로 외교를 펼치고 싶었고 조선만큼이나 '우리'를 가리키는 용어가 '한(韓)'이라고 여기고 앞에 '대(大)'를 붙여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효종어보는 영조 16년(1740년)에 효정에게 '명의정덕'이라는 존호를 올리며 제작됐다. 효종 승하 직후인 1659년(현종 즉위년)에 시호를 올렸고 1740년(영조 16년)과 1900년(광무 4년)에 존호를 올렸으며 이때마다 어보가 제작됐다. 현재까지 효종어보 3점 중 1900년에 제작한 어보(국립고궁박물관 소장)만 전해오고 있었는데 이번에 1740년 제작 어보를 환수함에 따라 이제 1659년에 제작된 어보를 제외하고는 효종과 관련된 어보 2점은 모두 국립고궁박물관에 무사히 보관할 수 있게 됐다.
|
정재숙 문화재청 청장은 "70여점의 어보와 국쇄가 외국을 떠돌고 있다. 하루빨리 우리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미국과세청과 국가안보수사국과 긴밀하게 협조체제를 갖추고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상하반기에 (국새를 찾을 수 있는 곳에)리플렛을 광범위하게 뿌릴 예정이다. LG에 협조를 요청해 타임스퀘어에 광고 홍보영상을 틀 예정이다. 마지막 한점까지 우리에게 오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89hklee@newspim.com
저작권자(c) 글로벌리더의 지름길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Newspim),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