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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세상읽기] 힘이 들어가서 망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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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천재 골프 소녀 미셸 위의 부모는 남자 대회에서 초청받자 여자 대회를 무시하고 더 강한 힘과 먼 거리를 필요로 하는 남자 대회 출전을 고집했다. 아마도 미셸의 부모는 어려운 남자 대회에서 단련하고 나면 여자 대회쯤은 상대적으로 쉬워질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결과는 실패였다. 미셸의 물 흐르듯 하면서도 강력한 스윙은 힘이 잔뜩 들어간 스윙으로 바뀌어 버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니 숏게임이나 퍼팅도 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르니 '그냥 평범한 프로골퍼'로 전락했다. 이후 몇 번의 우승을 하긴 했지만 그녀의 잠재력에 비하면 초라한 결과였다.

김조한은 '이 밤의 끝을 잡고' '널 위해 준비한 사랑' 같은 감성적인 노래를 선사하던 가수다. 이런 김조한이 '나는 가수다' 경연에 출전하면서 흐름이 깨지기 시작했다. 청중이 현장에서 한 표씩 행사하는 '나가수'는 고음으로 지르는 가수들이 유리하다. 부드러운 창법으로는 점수가 잘 안 나오니 김조한은 지르는 창법을 써보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고함을 질러대는 그의 노래는 그야말로 안쓰러울 정도로 부자연스럽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가수' 탈락 이후 한동안 김조한은 노래가 잘 안 되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손흥민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팀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한 수 위인 것은 분명했지만 볼을 잡은 손흥민에게서 당시 독일 리그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드리블은 없었다. 볼을 잡으면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잔뜩 힘이 들어가 서둘러댔다. 최근에는 A매치에 익숙해지고 내공도 더 깊어져 부드러워졌다. 어린 선수에게 거는 국민과 부모의 기대는 A매치에서 힘이 들어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메시도 힘 들어가서 망쳤다.

정치판에 뛰어든 안철수 씨는 원래 부드럽고 사심이 없는 이미지의 애국 기업인이었다. 그런 그가 청춘콘서트 같은 대중 행사를 통해 인기를 얻고 국민적 지지도가 올라가면서 대통령의 꿈을 갖기 시작했다. 콘서트의 청중은 무대 위 주인공을 더 크게 보기 마련이다. 한심한 정치판에 질린 대중은 영웅을 갈구했고 그가 운 좋게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모습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힘을 빼지 못한 채 1차 경력을 마무리했다. 버거우면 힘이 들어간다.

교육학자 칙센트미하이의 명저 '몰입의 즐거움'의 원제목은 'Flow'다. Flow라는 단어의 대표 의미는 '흐름'이다. 몰입은 힘을 잔뜩 넣고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스러움과 통제됨이 결합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넓은 시야와 가까운 미래의 전개에 대한 편안한 예측 능력이 없으면 힘들다. 그렇게 되려면 대개 오랜 기간 고통스러운 기초 확립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전문가의 특징은 다양하지만 가장 상징적인 모습은 '힘이 빠져 있는 것'이다. 스키 날에 편안하게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턴을 하는 스키 선수 같은 모습.

요즘 우리 정치판은 힘이 너무 들어가 있다. 특히 여권이 여유가 없다. 언어 습관과 감정 표현, 논리, 실수에 대한 대응 등을 보면 생소하다. 역대 여권들이 대개 무능했지만 지금같이 힘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경우는 못 본 것 같다. 야당은 현재 상태로는 평가하기도 귀찮을 정도다. 정치적 공과를 떠나서 고 김종필 총리·김근태 의원·노무현 대통령·노회찬 의원 같은 사람들이 보기 좋게 힘이 빠진 모습이었던 것 같다. 힘이 빠져야 그들처럼 본질을 볼 여유가 생긴다. 힘 빠진 정치인, 힘 빠진 기사를 많이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이 칼럼도 힘이 충분히 빠지지 않았다.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주)옵투스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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