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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국적 없는 외국어 표기만 줄여도 우리말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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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박양우 문체부 장관 특별 기고

한국어에 빠진 중동 젊은이들 "고유의 리듬과 발성이 매력적"

정작 우리는 외국어 남발로 디지털 시대의 新문맹 초래… 공공언어부터 바꿔나가야

'바람이 시원하다' '국물이 시원하다' '속이 시원하다.'

우리말 '시원하다'는 바람의 온도와 청량감, 국물의 열기와 얼큰함을 나타낼 뿐 아니라 답답한 속이 풀린 것까지 뜻하는 단어다. '시원하다'는 지난 1월 20일 아랍에미리트 세종학당에서 만난 현지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어 단어로도 꼽혔다. 우리나라에서 약 7000㎞ 떨어진 곳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빠진 젊은이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들은 '한류' 동호회를 꾸려 유튜브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면서 우리 문화의 전령사 노릇을 했다. "한국어에는 고유의 리듬이 있고, 발성의 매력이 넘치며, 비슷한 뜻의 여러 가지 단어가 많아 재밌다"고 말할 땐 가슴이 벅찼다.

조선일보

지난달 19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자이드대학에 마련된 세종학당을 찾은 박양우 문체부 장관이 히잡 쓴 학생들과 함께 붓글씨로 한글을 써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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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국내 상황은 정반대다. 다채로운 표현이 가능하고 이해하기 쉬운 한국어 대신 외국어가 난무한다. 국어 정책을 담당하는 장관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난달 언론들에 등장한 단어들만 봐도 그렇다. '블랙아이스 주의' '싱크홀 원인 조사' '필리버스터 대치' '패스트트랙 재판'…. 이러한 용어들을 접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 답답했던 분이 많을 것이다. 한글이 외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쉽게 쓸 수 있어서인지,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어려운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일이 빈번하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공공언어 인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27%만이 '공무원들이 국민의 입장에서 용어를 사용한다'고 느꼈다. 공공기관이나 언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는 달라야 한다. 사적인 대화는 그들끼리 알아들으면 그만이지만, 공공의 언어는 국민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서울역에서 반가운 현수막을 봤다. "도로살얼음, 제발 속도 줄이세요." 블랙아이스 대신 '도로살얼음'이라고 하니 금세 파악이 됐다. 얼마 전부터 우리 부가 국립국어원과 함께 최근 새로 등장한 외국어를 우리말 대체어로 바꿔 제공한 노력이 결실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1코노미'는 '1인 경제', '원포인트 회의'는 '집중 회의', '필리버스터'는 '무제한 토론' 등으로 '새 말'을 만들고 있다. 클라우드, 빅데이터, 딥러닝 등과 같은 용어도 처음 들어왔을 때 쉬운 우리말로 먼저 만들어 보급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이 용어들의 뜻을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편리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 신문맹(新文盲)을 만들고 기술 혁신을 어렵게 만든다. 4차 산업혁명의 변화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학문 분야의 전문용어들도 우리말로 다듬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 그것이 지식문화 강국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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