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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일사일언] 간단히 국수나 끓여먹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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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저자


얼마 전, 어릴 때 과학 글쓰기 대회에서나 그려 보았던 2020년에 도착한 소회(?)를 동료들과 나누었다. 식사 자리였기 때문에 '한 알만 먹으면 배부른 약'이 왜 아직도 안 나오냐고 한탄했다. 그날도 우리는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고, 나는 냉장고 상황을 고려하면서 언제쯤 장을 보러 갈지 계획을 세웠다.

'먹고사는 것'의 지겨움은, 내 손으로 벌어 먹고살지 않을 때부터 익히 알았다. 책이나 매체를 통한 간접체험으로 배웠다. 생계의 치사함, 그 앞에서 꺾어지는 개인의 신념과 존엄, 부양의 책임감 같은 것들 말이다. 조잡하지만 어쨌든 내 손안에 뚝 떨어진 1인분의 생활을 굴리면서부터는, 이 '먹고산다'에서 '먹고' 개념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1차원적인 개념의 '먹는' 비중이 너무 컸다. 인간이 생존하려면 필수적인 행위인데도, '먹고살'려면 '먹기 전'에 얼마나 많은 절차와 노동이 필요한지, '먹고 난' 후에는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가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냉장고 상황을 파악하여 장을 보고 식단을 짠다. 재료를 다듬고, 지지고 볶아야 밥상이 차려진다. 다 먹으면 남은 음식물을 분류하고, 그릇을 나눠서 설거지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한 뒤 싱크대의 물기까지 닦는 절차가 기다린다. '먹기 위해 준비하고 먹은 다음 치우는' 일이야말로 지겹게 반복되는 노동 그 자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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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에 나오는 집요정이 만들어준 것처럼 '집밥'이 뿅 나타나는 줄 아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온전히 물러나 있기에 낭만에 취할 수 있다. "간단하게 국수나 먹자" 같은 말을 하는 천진난만함 말이다(국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가사노동만이 아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떤 과정에서는 반드시 타인의 수고와 노동이 들어간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기대어 생존하는 존재이고,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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