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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정민의 世說新語] [559] 벌모세수 (伐毛洗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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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동방삭(東方朔)이 홍몽택(鴻濛澤)을 노닐다가 황미옹(黃眉翁)과 만났다. 그가 말했다. “나는 화식(火食)을 끊고 정기(精氣)를 흡수한 것이 이미 9000여 년이다. 눈동자는 모두 푸른빛을 띠어 감춰진 사물을 능히 볼 수가 있다. 3000년에 한 번씩 뼈를 바꾸고 골수를 씻었고, 2000년에 한 차례 껍질을 벗기고 털을 갈았다. 내가 태어난 이래 이미 세 번 골수를 씻고 다섯 번 털을 갈았다.(吾却食呑氣, 已九千餘年. 目中瞳子, 皆有靑光, 能見幽隱之物. 三千年一返骨洗髓, 二千年一剝皮伐毛. 吾生來已三洗髓五伐毛矣).” 후한 때 곽헌(郭憲)이 쓴 ‘동명기(洞冥記)’에 나온다.

9000세를 살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천지의 정기를 흡수해서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안 된다. 3000년에 한 번씩 육체와 정신을 통째로 리셋해야 한다. 뼈를 바꾸고 골수를 세척하는 반골세수(返骨洗髓)나 껍질을 벗기고 털을 다 가는 박피벌모(剝皮伐毛)는 환골탈태(換骨奪胎)와 같은 뜻으로 쓰는 표현이다. 거듭나려면 묵은 것을 깨끗이 다 버리고, 뼈와 골수까지 새것으로 싹 바꿔야 한다. 이것도 아깝고 저것도 아쉬우면 거듭나기는 실패하고 만다.

정희량(鄭希亮·1469∼1502)은 '야좌전다(夜座煎茶)'에서 "노을 먹고 옥을 먹어 수명을 연장하고, 골수 씻고 털을 갈아 동안(童顔)을 유지하네(餐霞服玉可延齡, 洗髓伐毛童顔鮮)"라고 신선의 장생불사를 선망했고, 성현(成俔·1439~1504)은 '효선요(曉仙謠)'에서 "만약에 높이 날아 자줏빛 안개 타면, 털을 갈고 골수 씻어 나는 신선 따르리(若爲遐擧乘紫煙, 伐毛洗髓隨飛仙)"라고 노래했다.

'역근경(易筋經)'은 달마(達摩) 대사가 도가의 방술을 정리했다는 책자다. 역근(易筋), 즉 근육을 바꿔 육체를 단련한다. 무협지에 이 책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세수경(洗髓經)'이란 책도 있다. 골수를 세척해서 정신을 수련한다는 뜻이다.

선거철이 다가오자 정당마다 벌모세수로 환골탈태하겠다는 물갈이와 인재 영입으로 시끄럽다. 싹 들어내서 통째로 바꾸겠단다. 바꾸긴 바꿔야겠는데, 바꿀 것은 안 바꾸고 안 바꿀 것만 바꾸려 드니 장생불사를 어이 꿈꾸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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