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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일사일언] 신인류의 대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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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내가 잠깐 헛기침을 하자, 딸이 말했다. 그러더니 스마트폰을 켜 20년 전 방영된 드라마 '태조 왕건'의 '움짤'(움직이는 사진)을 보여준다. 극중 궁예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신하를 다그치는 장면인데,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지자 다시 인기를 얻어 인터넷 유희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원래 맥락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현재를 빗대는 '움짤' 문화 앞에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붉은 여왕의 말을 떠올렸다. "제자리에 있으려면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한다"는.

나는 '디지털 이주민'이다. 최첨단 사무 자동화 설비를 갖춘 첫 직장에 들어가고서야 컴퓨터를 업무용으로 받아들인 세대다. 워낙 기계치인 데다 늦게 배운 탓에, 기계와 관련해서는 내가 쓰는 것 이외에 딱히 관심이 없는 게으른 성정 탓에, 디지털은 항상 나를 비굴하게 만든다. 그럴 때면 번번이 나는 '디지털 이주민'이라는 말로 상황을 모면하며, 나름 스티브 잡스의 업적과 그의 성과물을 가장 애용한다는 점을 들어 위안 삼곤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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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천지개벽했다. 피아노를 치며 음의 무게를 체감했던 나는 피아노 대신 액정 화면의 동질적 건반을 통해 서로 다른 음색을 익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연필로 한 자씩 써내려가며 한글을 몸에 각인했던 나는 화면 속 자음·모음을 조합해 한글을 깨치는 세대를 만나고 있다. 어쩌면 이 변화 속에서 내가 놓친 것은 디지털 기기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이 파생시킨 새로운 생활 방식과 소통법 아닐까. '움짤'로 감정을 표현하고 농담을 건네는 딸 세대의 소통 방식을 바라보며 '신인류'와 공존할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최선을 다해 뛰어야 겨우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붉은 여왕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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