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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술 대신 담배, 그리고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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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

전작과 달리 술꾼은 나오지 않아

대신 담배 피우거나 우는 인물들

기간제교사, 동성연인, 고독한 소녀…

가난하고 힘겨운 인물들 향해

‘조심해야지’라 건네는 염려의 말


한겨레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2016)와 ‘안주’ 산문집 <오늘 뭐 먹지?>(2018)로 얻은 주당(?) 이미지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권여선의 새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에는 술꾼이 등장하지 않는다. ‘모르는 영역’과 ‘송추의 가을’ 같은 단편에 나오는 인물들이 술을 마셨다는 언급은 있지만, 막상 음주 장면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전갱이의 맛’에서는 이혼 뒤 삼 년 만에 만난 남녀가 늦은 점심을 먹으며 술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끝내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술 대신 담배랄까.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봄밤’에서 중증 알코올중독인 영경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술을 마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번 책에 실린 ‘재’의 주인공은 심각한 질환으로 수술을 앞둔 터에 식당 주인에게 담배를 얻어 피운다. 수술 뒤에는 무망해질 모종의 생의 감각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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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 장면은 ‘송추의 가을’에서 더 자주 더 노골적으로 묘사되고, ‘너머’에서는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어머니가 피우던 담배 냄새가 되살아난다. ‘희박한 마음’에서도 두 여주인공이 수십 년 전 대학 시절 학교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남학생에게 뺨을 맞았던 끔찍한 기억이 소환된다.

<아직 멀었다는 말>의 주인공들이 술과 담배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눈물과 울음이다. ‘모르는 영역’에서 화가 주인공의 “눈에 탁한 눈물”이 고이는 것은 모종의 안과 질환과 무관하지 않다고 치자. 기간제 교사 엔(N)의 이야기인 ‘너머’ 말미에는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N은 흐느끼면서 생각했다”는 문장이 나오고, ‘송추의 가을’은 아예 “그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울었다”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희박한 마음’의 주인공 데런의 동성 연인이었던 디엔은 부당한 혐의를 추궁하는 선배들에 맞서 “울면서 증언”하는 꿈을 꾼다. 주인공 소희가 “조금만, 조금만, 하며 울 듯이 앉아 있다”는 ‘손톱’의 마지막 문장 역시 밖으로 드러내 놓은 울음은 아니어도 속으로 우는 울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은 왜 우는가. ‘모르는 영역’의 화가와 장성한 그의 딸 다영은 그들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사람이 근 8년 전 죽은 뒤 서먹하고 버성긴 관계를 이어 간다. 부녀가 모처럼 만나 어울리는 1박2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에서도 두 사람은 오해와 불만, 긴장과 갈등을 떨치지 못하고 시종 허우적댄다. 그런 점에서 “해 입장에서는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라는 아버지의 생각은, 아무리 가까운 가족 사이라도 이해와 용납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부분이 있다는 체념 섞인 깨달음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아빠 만나서 그거 하나는 좋았어요”라는 딸의 말은 얼음 같고 사막 같은 부녀의 관계에 어느 정도의 온기와 생기가 돋아날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눈물은 안과 질환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너머’의 주인공은 이중의 곤궁에 처해 있다. 그가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학교는 “치사하고 악질적인 쪼개기 계약과 계약 연장 꼼수”로 그를 괴롭힌다. 어머니가 넉 달 전 뇌 수술을 받고 심신이 무너진 상태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간병인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야 알게 된다. 한편으로 그는 학교에서 자신이 놓인 처지를 두고 “이따위, 이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라며 자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불가피한 죽음을 예감하며 “순식간이야” 하는 혼잣말을 내뱉는다. “가슴 한쪽에선 잔혹한 마음이 불처럼 일어나고 다른 한쪽에선 두려운 마음이 돌처럼 가라앉았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며 그가 흐느끼는 것은 이런 이중의 곤경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키고 싶다는 안쓰러운 자기 다짐일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안쓰럽기로 첫손에 꼽으라면 ‘손톱’의 주인공 소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스물두살을 눈앞에 둔 이 여성은 두 번이나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홀어미는 아비가 다른 언니 본희의 저금과 대출금을 챙겨 집을 나갔고, 그 뒤 8년간 소희와 함께 살았던 본희도 얼마 전 “소희가 저금한 돈 천오백만원과 소희 이름으로 대출받은 천만원을 가지고 사라졌다. 엄마랑 수법이 똑같았”다. 옥탑방에 살며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일하는 소희가 언니가 들고 튄 대출금과 옥탑방 보증금을 위한 대출금을 갚기 위해 알량한 월급을 만원 단위로 쪼개 가며 계산을 맞추는 장면은 눈물겹다.

매장에서 상자 정리를 하던 중 다친 손톱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치료비로 아까운 돈 7만원을 지출한 소희는 마침내 폭발한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어쨌다고? 내가 뭐? 내가 뭘? 뭘? 뭘?” 이런 말조차 누구에게 대놓고 퍼붓지 못하고 작은 혼잣말로 분출하는 소희. 매장 동료들조차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존재하다”고 느낄 정도로 존재감이 희박한 소희. 그가 일없이 들른 휴대전화 매장 대기실에서 마주친, 자신과 비슷하게 가난하고 갈 곳 없어 보이는 할머니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울린다. “조심해야지.” 손톱 절반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징그러운 벌레 같은 혹이 남은 소희의 엄지손가락을 보며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던 것. “대화가 안 된다 매가리가 없다 무나아안하다 생각이 없다, 그런 말 대신 조심해야지, 하고 말해준” 할머니의 염려는 소설집 속 인물들을 향한 작가 권여선의 마음씀이 아니겠는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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