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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말의 전쟁…설득할 것인가, 설득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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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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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콘

맥스 배리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2020)

<렉시콘>은 단어를 두고 벌이는 전쟁을 그린 언어적 에스에프(SF) 스릴러이다. 어휘 목록이라는 뜻의 렉시콘(lexicon)은 실물의 사전을 가리키기도 하고, 한 인간에게 내재하여 쓸 수 있는 어휘의 집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의 무기가 바로 이 어휘, 단어이다. <엑스맨>이나 <킹스맨>처럼 자질 있는 소녀, 소년 들을 모아 요원으로 키우는 비밀 조직이 있다. 이 조직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철학, 심리학, 언어학, 컴퓨터 공학과 함께 사이코그래프 분류에 따라 인간을 228가지 범주로 나누는 법도 익힌다. 각 범주에는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가령, ‘주스티트락트. 메그란세. 바르틱스’처럼. 이 단어를 알면, 220범주의 인간은 내 힘 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의 위에 날단어가 있다. 절대 반지처럼 모든 인류를 파멸에 몰아넣을 수 있는 단어이다.

스릴러는 두 시점의 장면이 교차하여 만들어진다. 하나는 윌 파크라는 남자의 시점이다. 그는 공항 화장실에서 두 남자에게 납치된다. 엘리엇과 브레히트, 시인들의 이름을 쓰는 이 남자들은 또 다른 시인들, 특히 울프에게 쫓긴다. 엘리엇은 윌을 ‘치외자’라 부르며 날단어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지만 윌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또 다른 플롯은 에밀리 러프가 주인공이다. 거리에서 야바위꾼으로 살아가던 소녀 에밀리는 우연히 만난 수상한 남자의 안내로 문제의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학교에서 에밀리는 자신에게 잠재된 설득의 힘을 발견한다.

복잡한 설정 같지만, 누구나 일상에서 겪는 상황들이다. 언어로 구성된 우리 세계에서, 한 단어는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하는 행동이 타인의 말과 상관없이 이루어졌다고 아무도 자신할 수 없다. 책, 인터넷, 티브이(TV), 매일 끊임없이 들어오는 정보가 내게 지시를 내린다. 우리는 한마디의 말로 서로의 버튼을 눌러 폭발하게 할 수도 있다. <렉시콘>에서는 개인 정보 침해와 악용, 빅브라더식 통제, 총기 난사 사고 등 현대 사회가 겪는 심각한 사건들이 언어의 은유로, 실재 경험으로 일어난다.

나도 에밀리처럼 오래전에 신경언어학 수업을 들었지만, 거기서는 단어로 인간을 조종하는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도 말로써 어떤 책을 읽도록 권하는 일이다. 누군가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그의 단어를 알아내어 설득한 것이리라.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개인 정보의 한 파편을 넘긴 것일 뿐이다. 그렇게 흘러간 정보로 나는 한 범주의 인간으로 분류될 테고 언젠가 그를 이용한 타인에게 설득당할 것이다. 이런 단어 전쟁에서 개인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는 우리도 윌처럼 수많은 단어에 쫓기면서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책의 결말에 나온 대답은 약간 뻔하지만, 정답은 늘 약간 뻔한 데가 있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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