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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우린 그때 유령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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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작가 김동수, 대학 내 청소노동자 투쟁 생생히 기록

인간답게 할 최소 울타리 ‘민주노조’… 지키긴 더 어려워


한겨레

유령들: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김동수 지음/삶창·1만4000원

미끄럼 방지를 위해 계단코에 붙여놓은 알루미늄을 ‘신주’라고 한다. 신주는 일반세제로 닦으면 광이 나지 않아서, 청소노동자들은 돌가루에 물을 조금 섞은 세제를 직접 만들어 쓴다. 세제를 신주에 묻히고 구둣솔로 100번쯤 박박 문질러야 비로소 광이 난다. ㄱ대학 8층 건물의 계단은 144개. 매일 1만4400번 솔질을 하는 이 대학 청소노동자들은 극심한 어깨 통증에 시달린다. 무려 4차산업혁명시대에 꼭 이런 방법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금속광택제를 사용해도 되고, 단 10초 만에 광을 내주는 기계도 개발돼 있다. 하지만 청소노동자들을 고용한 용역업체는 ‘수작업’을 선호한다. 돈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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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대학 민주노조 분회장인 수연씨는 기계를 도입할 때까지 신주를 닦지 않는 단체행동을 조직했다. 비노조원들이 따라주지 않아 결국 무산됐지만 “그래도 노조가 생겨서 많이 나아졌다”고, 수연씨는 회고한다. 이전까지는 용역업체 소속 현장관리직원인 ‘소장’의 말이 곧 노동법이었다. 역대 소장들은 작업복과 청소물품 구입비 등을 살뜰히 착복하는 한편 ‘청소’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했다. 여름엔 제초, 겨울엔 제설, 가을엔 도토리와 은행 수거, 명절이면 대학재단 이사장네 묘소 벌초에, 이사장 막내아들의 신혼집 청소도 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오전 6시 출근으로 돼 있는데 4시까지 안 나오면 ‘지각’이었다. 계단 밑이나 물탱크실, 여자화장실에서 숨듯이 휴식을 취하고 설비도 안 된 식당에서 교대로 10분씩 밥을 먹었다. 무급노동은 흔하고 징계와 해고는 너무 쉬웠다.

로봇학을 공부한 르포작가 김동수가 청소노동자에 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자신이 졸업한 대학에서 청소일을 시작한 건 민주노조가 생기고 3년째 되는 해였다. 그는 일하면서 자신이 ‘유령’ 취급을 받는다고 느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일하고, 먹고, 이동하고, 쉬어야 했다. 대학의 다른 구성원들은 그와 같은 공간에 있기를 기피할 뿐 아니라 아예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노조 조합원들이 북을 치며 구호를 외치든, 총장에게 울며 애원하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노조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우리의 울타리”라고, 노조를 만든 ‘언니들’은 입을 모았다. 감시와 협박을 견디며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준비 끝에 어렵게 출범한 노조다. 처음엔 소장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어느새 임금협상을 위한 집단교섭과 쟁의 3년차. 지은이는 무시로 일관하던 용역업체와 대학을 기어코 협상테이블로 끌어 내 시급 830원 인상을 관철해 낸 ㄱ대학 민주노조의 ‘뜨거웠던 여름’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힘들게 세운 울타리가 흔들린 건 이곳에 또 다른 노조가 생기면서부터다. 한 사업장에는 여러 개 노조를 설립할 수 있고, 더 많은 조합원을 확보한 노조가 대표교섭권을 갖는다. 소장은 새 노조 조합원들의 근무평가점수를 후하게 주고 각종 편의를 봐주는 등 교묘히 ‘노-노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분열 작전을 썼다. 소장의 배후에는 ‘시키는 대로 일하는 노동자’를 원하는 용역회사와 대학이 버티고 있다. <유령들>은 인간다운 삶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울타리를 만들고 지키며 오늘도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김동수 작가는 힘든 싸움 끝에 어쩌면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책을 썼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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