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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떡볶이는 이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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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책이 내게로 왔다

한겨레

영화 <벌새> 시나리오 원고를 편집하면서 다른 문장보다 특별히 더 아름답거나 전개상 결정적인 내용이 아닌데도 오래 기억되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영화에서는 삭제된 장면 중 하나를 맺는 문장이었다. 주인공 은희는 병원에 들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언니 수희와 만나 떡볶이를 먹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들뜬 은희의 계획은 갑작스러운 경적에 좌절된다. 은희를 따라 급히 건널목을 건너던 수희는 차에 치일 뻔했고, 거기에 놀라 수희는 은희를 매섭게 다그친다. 그리고 그 끝에 “떡볶이는 이제 무산되었다.”

‘떡볶이’와 ‘무산되다’ 사이를 오가는 시선이 몇 번씩이나 종종거렸다. 대단히 잘못되었다거나 의미에 혼선을 주는 건 아니었다. 두 단어가 맞물리는 데서 풍기는 묘한 이질감이 마음에 걸렸다. ‘무산되다’는 말 그대로 안개가 걷히듯 흩어져 없어진다는 뜻으로 일, 계획, 약속 따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없던 것이 되었을 때 쓰인다. 애초에 떡볶이를 먹으려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한 것이니 ‘떡볶이를 먹으려던 계획은 이제 무산되었다’로 바꾸어 보아야 할까. 친밀한 두 사람 사이에 일상적인 언어로 오간 대화를 맺는 문장이니 분위기에 맞추어 ‘떡볶이 얘기는 없던 일이 됐다’고 해야 할까. 고민 끝에 그 문장은 수정 없이 그대로 실렸다.

<벌새>는 아주 가까운 데부터 더듬거리며 자기와 세계를 마주하기 시작한 중학생 은희의 삶과 압축성장의 끝에 당도한 사회적 재난이라는 서로 다른 두 무늬를 중첩해 완성된 이야기이다. 이 두 세계는 <벌새>가 있기 이전까지 ‘떡볶이’와 ‘무산되다’만큼이나 어긋난 채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벌새>라는 이야기가 가진 원형성은 만나지 못할 것 같던 두 세계를 하나의 서사로 구현한 성취였다. 그 원형성이, 책으로 엮은 <벌새: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에 수록된,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이야기들이 조화롭게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게 한 힘이기도 했다. 그렇게 완성된 <벌새>의 세계는 원대한 국가의 꿈과 대의, 한껏 부풀어진 사회의 욕망이 좌절되고 무산된 자리에 ‘떡볶이’만큼의 행복과 희망과 위안이 피어나고 스러지는 순간들을 투영한다.

어느 순간에는 은희였고, 지숙이였고, 수희였고, 엄마였을 사람들은 책을 읽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문장을 길어 냈다. 어떤 이는 오래 숨죽이며 감내하던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보듬어 준 말들을 가슴에 품었고, 어떤 이는 고통의 근원을 짚어 낸 세심한 말들을 기억하고 새겼다. 그렇게 책 속 문장들이 또 다른 공통의 기억이자 기록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 온 수많은 은희의 존재들을 확인했다. 그럴 때면 <벌새>가 하필 내게로 와 책이 된 것에 벅차고, 감사했다.

이제 나를 포함한 은희들은 어색할 것도 없이 떡볶이가 무산된 세계의 하루를 각자 자리에서 포개어 간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여전히 알 수 없고, 아무도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폭력들을 마주하는 속에서. 하지만 이제는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을 믿게 된 것에 사랑을 느끼면서.

김지은 아르테 인문교양팀 편집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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