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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ESC] “이 이야기는 전 세계의 누구도 나보다 잘 쓸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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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세희가 본 내 친구 박상영

방송 출연·새 장편소설 준비 등 바쁜 박상영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3월께 출간 예정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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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은 어떤 사람이야? 누군가 내게 물어볼 때마다 매번 다른 대답을 하게 된다. 박상영? 그의 소설과 똑같은 사람이지. 누구보다 웃기고 목소리가 큰 수다쟁이야. 눈물이 많아서 누가 울면 어느새 따라 울고 있어. (그는 이 인터뷰를 하면서도 한 번 울먹였고 다른 한 번은 우는 줄 알고 놀랐는데 트림을 참느라 말을 멈춘 것이었다.)

그 밖에 내가 좋아하는 대답이 하나 있다. 바로 “박상영은 칭찬을 못 견디는 사람이지” 다. 그와 나는 2012년 가을 한 소설 합평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어떤 이상한, 또는 독한 코멘트를 듣건 1초도 지체 없이 웃는 얼굴로 받아치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상대의 입에서 칭찬이 나올 때는 몹시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합평 수업에서 친해진 우리는 이후 스터디를 결성해 열심히 소설을 썼고, 비슷한 시기에 등단해서 두권의 소설책을 가진 작가가 되었는데, 칭찬 앞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박상영을 보고 놀려댄 적이 참 많다.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출간을 앞둔 그를 인터뷰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를 당황하게 만들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보았다.

―2016년 가을 데뷔해 지금까지 참 많은 글을 발표했어. 첫 번째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지난여름에 나온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모두 평단과 독자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았잖아. ‘칭찬 포비아’에게는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운 시간이었을 것 같아. 칭찬에 좀 익숙해졌니? 가장 마음에 드는 칭찬을 꼽아본다면.

“면전에서 평가받는 상황은 여전히 부담스러워. 내가 워낙 그런 성향의 사람인가 봐. 소설 재미있게 봤다는 리뷰는 물론 기쁘지. <대도시의 사랑법>을 내고 나서 퀴어 독자들로부터 ‘지금까지 로맨스물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의 로맨스를 대변해주는 서사가 없어서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이야기를 몇 번 들었거든. 그럴 때 뿌듯함을 느껴. 읽고 나서 사랑하고 싶어지는 소설이라는 거지. 자기 일처럼 받아들여서 깊이 감정이입했다는 거니까 진짜 기쁘지.”

성공한 작가로 인터뷰 등에서 무례한 일 겪어

퀴어작가로 대표성 띠게 되면서 투쟁 중

최근 ‘이상문학상’ 관련 문제 제기

신인 작가들에게 조언해 주는 선배 될 터

―요즘은 어떻게 지내? 근황을 소개해줘.

“<한겨레>에 연재했던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를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작업을 막 마쳤고, 지금은 3월부터 연재할 새 장편소설을 쓰고 있어. 얼마 전부터 <한국방송>(KBS)의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은 녹화하러 가고. 요즘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에세이 출간을 마지막으로 ‘시즌1’을 정리하는 느낌이야. 곧 이사도 갈 예정이고. 7년 동안 같은 집에 살았거든. 옷장에도 책이 있고 책상 위에도 책이 있고 바닥에도 있고, 책꽂이들은 다 주저앉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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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에 ‘오은·요조의 요즘은’ 코너에서 요조와 했던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어. <대도시의 사랑법>이 출간되기 전이었지. 우린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서로 보여주고 코멘트를 해주잖아. 나는 네 초고를 읽는 데 익숙하지. 그런데 이 소설들은 초고를 읽을 때부터 느낌이 달랐어. 뭐랄까, 농도로 치면 정말 진했지. 피처럼. ‘이 친구가 지금 심혈을 기울여 쓰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고 읽으며 울컥할 때도 많았어. 아니나 다를까 출간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지.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연작소설에는 모두 소설가 ‘영’이 화자로 등장하는데, 본인에게는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

“소설에 작가나 시인을 등장시키지 말라, 이게 내겐 큰 금기 중 하나였어. 등단하고 한 번도 그런 소설을 쓴 적이 없어. 하지만 여기 실린 소설들을 쓸 때는 그냥 그렇게 쓰기로 마음먹었어. 처음부터 연작소설로 구성했었고, 사람들이 최대한 진짜처럼, 실제로 누군가가 겪은 일처럼 느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 물론 ‘재희’와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같이 구상하면서 두려움도 있었지. ‘퀴어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절대 아니었고, 다만 신인 작가로서 내가 평단이나 일부 독자들에게 특정한 의제나 주제로 쉽게 ‘사용되고’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가까웠어.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쓰려고 하는 이 네 편의 이야기, 이 한 권의 소설은 전 세계의 누구도 나보다 잘 쓸 수는 없을 거다’라는 믿음이 있었어. 이 세상에 화두로 던질 만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누구보다도 진심을 다해 쓸 자신이 있었어. 이 작업이 나 자신한테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거라는 확신도 있었지. 살면서 전에도 후에도 이런 확신이 있었던 적이 드물어. 더 이상 작가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을 안 써도 좋을 만큼 <대도시의 사랑법>에 남김없이 쏟아부었어. 앞으로는 다양한 시점과 소재의 이야기를 많이 써보고 싶어. 진지하지 않더라도 마냥 재밌고 단순한 이야기도 좋아하거든.”

―출간하고 난 후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작가는 생각보다 시끄러운 직업이라는 거야. 특히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 퀴어소설의 대표주자로 호명되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 사건에 휘말렸고 구설에도 올랐어. 한 일간지에서 커밍아웃한 작가로 소개하는 오보 사태도 겪었고. 인터뷰에서 무례한 질문을 받은 적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잖아. 매번 이건 이래서 잘못된 것이다, 설명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이겠구나 생각했어.

“얼마 전 ‘2020 젊은작가상’ 대상을 탄 강화길 작가를 인터뷰했는데, 강 작가가 소설가는 메타포(은유)로 세상과 소통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어. 내가 소설을 좋아하고 쓰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해. 나는 소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서 작가가 됐는데, 자연인으로서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는 걸 독하게 배웠던 거 같아. 지난 몇 년간 인터뷰나 행사 때마다 잘못된 질문, 부적절한 말들에 개인적으로 항의하고 싸워가면서 여기까지 왔지. 문제를 제기하고 사건을 만들고 할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작가로서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하는 것,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데 끊임없이 투쟁하는 상황이 돼. 지금도 사실 매일 투쟁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퀴어작가로서 대표성을 띠게 되었고, 그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 대표성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발언하려고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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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가의 꿈을 이루고, 책을 출간하고 원하는 상을 받아도 그것이 그대로 행복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자신의 삶을, 일상을 어떻게 살지 탐구하는 마음으로 에세이를 썼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1년간 <한겨레>에 연재한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의 주인공은 매일 새벽 일어나 카페에서 2시간 글을 쓰다 사무실로 출근해서 9시부터 6시까지 직장인으로 지내고,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인물이다. 다이어트, 폭식, 요요현상, 비만인으로 감내해야 하는 사회의 시선 등 여러 이야기가 솔직하게, 그리고 절절하게 담겨 있다.

―‘다이어트’가 키워드지만 ‘비포 애프터’류의 성공기나 다이어트 꿀팁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깜짝 놀랄 것 같아. 성공담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니까. 이 콘셉트는 미리 정해뒀던 거야?

“나는 오랜 시간 이런 문제를 고민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도 누구보다 잘 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어. 사실 아직도 쓸 거리가 무궁무진해. ‘비포 애프터’ 사진을 넣을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연재를 하면 일주일에 한 번 굶을 거 세 번은 굶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어.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어. 더 악화됐지…. 왜냐면 연재 스트레스 때문에.”

―다이어트 에세이 연재가 다이어트에 악영향을 미쳤구나.

“생각해보면, 내가 살을 뺐더라도 에세이집의 방향은 지금과 같았을 거야. 건강한 신체와 삶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고 있을 뿐, 사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잖아. 대부분의 사회인은 날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먹는 것 말고는 풀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나뿐만은 아닐 거야. 종일 일 하다가 집에 와서 한 끼 배불리 먹고 잠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그럼에도 그들도 항상 나처럼 불편한 마음과 삶에 대한 불만족을 갖고 있을 거잖아. 그런 독자들이 제목 그대로 퇴근하면서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다짐하며 편하게 한 편 읽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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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만났을 때 먹는 얘기 하다가 “누나 난 이제 먹는 낙밖에 없다. 죄책감도 안 든다. 살 뺄 생각도 들지 않는다”라고 말했지. 진심인가요?

“‘죄책감이 안 든다’까지는 진짜야. 먹는 게 낙이야. 중독성 있어. 배가 안 부르면 잠이 안 와. 살 빼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지. 너무 빼고 싶고. 그런데 여전히 실패하고 있지. 하하하. 독자 여러분, 저처럼 처절한 실패를 겪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그래도 저 남자보다는 낫다, 위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힐링 책이네요?

“그럼요. 힐링 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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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문단의 큰 이슈인 이상문학상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문학사상사의 불공정한 요구에 반발해 김금희·최은영·이기호 작가가 우수상 수상을 거부했고, 전년도 대상을 받은 윤이형 작가는 작가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트위터를 통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러 작가가 지지와 연대의 뜻을 밝히며 문학사상 청탁을 거부한다는 글을 에스엔에스(SNS)에 올렸고, 박상영 작가도 이에 동참하며 트위터에 다음의 문장을 포함한 장문의 트윗을 올렸다. “작가들에게 있어서 작품은 자기 자신이나 다름없습니다. (……) 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작가들의 몫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쓴 계약서들을 보니까 나도 저작권을 양도한 경우가 있더라고. 모르고 넘어갔다는 게 너무 화가 나고 이것도 선례가 되었을 수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어. 이 상황에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신인 때 계약서를 보면서 모르는 점이 있으면 주변 선배 작가들에게 도움을 구하곤 했었거든. 나도 어느 정도 경험이 쌓였으니까 계약 관련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신인 작가분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어. 작가들이 다들 계약 조건이 다르다 보니 서로 묻기가 어렵잖아.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좋은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모든 계약은 협상이잖아. 요즘은 어렵고 두렵더라도 요구할 것은 요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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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출간하고 난 후 여러 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혼자 일하는 직업이라서, 동료가 없는 일이라서 쓸쓸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돌이켜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이전 작가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고, 같이 글을 쓰는 이들과 합평하며 작품을 고치고, 소설을 발표하면 서로 잘 읽었다고 격려해주는 선배 동료 작가들이 있는데도 어떻게 혼자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작가란 철저히 혼자이며 고독한 존재라는 오랜 ‘신화’에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요즘 동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박상영은 내가 글을 쓰며 처음 만난 동료이자 늘 설레는 마음으로 신작을 기다리는 작가다. 박상영의 ‘시즌2’를 기다리며, 미리 엄청난 응원을 보낸다.

김세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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