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Weekend Interview] 여성최초 공군 비행대대장 장세진 중령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장세진 제5공중기동비행 261공중급유비행대대장(중령)이 김해 공군기지에 있는 공중급유기 KC-330 앞에서 활주로를 걷고 있다. 공중급유기는 지난해 성공적으로 전력화를 마쳤다. 장 중령은 현재도 주 1~2회, 한 번에 4~8시간씩 KC-330으로 비행훈련에 임하고 있다. [김재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청춘연애물보다는 탐정소설에 탐닉하던 어린 소녀가 있었다. 또래 친구들에게 선풍적 인기였던 바비 인형 따위는 만져본 적도 없다. 동네 오빠들과 놀이터에서 뛰놀던 소녀는 온몸에 늘 상처를 달고 다녔다.

아버지는 경찰이었다. 이사와 전학을 밥 먹듯 하면서도 소녀는 늘 씩씩했다. 새로이 전학을 가는 학교마다 반장을 도맡았다. 딸만 다섯인 딸 부잣집의 맏딸. 씩씩함과 털털함은 늘 그의 몫이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까.

어느덧 성인이 된 소녀는 당시만 해도 철저한 '금녀의 영역'이었던 군인의 길을 택한다.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최초 여성 생도'가 된 것이다. '최초 여성' 타이틀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동안 그는 '여성 파일럿'의 역사를 써내려왔다.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동안 여군 최초 수송기 조종사, 여군 최초 보라매 공중사격대회 공중투하 부문 최우수상 등 굵직굵직한 발자국을 남겨왔다. 소녀가 써내려가는 여군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말에는 공군사관학교 동기생 2명과 함께 여성 최초 비행대대장 자리에 올랐다. 제5공중기동비행단 예하 제261공중급유비행대대를 지휘하고 있는 장세진 중령(41·공사49기)을 김해공항에서 만나봤다.

―왜 군인의 길을 택했나.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이었다. 내 성향을 아주 잘 아는 단짝 친구가 어느 날 신문광고 스크랩 하나를 나한테 내밀었다. "너 이런 거 되게 좋아하잖아" 하며 건네준 것은 공군에서 남녀 사관생도를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그때 처음 공사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알아볼수록 더욱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어땠길래 친구가 군인을 권유했나.

▷아버지가 경찰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여성스러운 성향은 아니었다. 예민하지도 않았고, 자잘한 데까지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인형을 갖고 놀아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럼 주로 뭘 좋아했나.

▷주로 관심 가는 분야가 모험 이야기였다. 탐정소설에 푹 빠지기도 했다. 셜록 홈스 광팬이다.

―조종사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했나.

▷뭣도 모르던 공사 1학년 시절 관숙비행이라고, 한번씩 항공기를 태워준다. 지금은 없는 T―41 훈련기였다. 옆에 교수님이 탔었는데, 비행하던 중 "하늘이라는 공간을 한번 느껴봐라"고 하면서 조종관을 잡아볼 기회를 주셨다. 길어봤자 1분 남짓이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않았던 손의 감각이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이 쾌감을 꼭 다시 느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경제

―어떤 쾌감이었나?

▷어렸을 때부터 놀이기구를 좋아했다. 특히 번지점프를 매우 좋아했다. 붕 뜨는 듯하면서도 하늘이 나를 완전히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막연하게 '나도 공사 생도니 조종사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이후로 반드시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관학교는 남자들의 성역이었다.

▷동기들은 정말 우리를 여성으로 보지 않았다.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구르느라 여자로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와중에 나는 동기와 사귀어 결혼까지 했지만…. 동기들은 정말 우리한테 큰 힘이 됐던 존재다. 여성 동기들을 가장 많이 이해하고 북돋워줬던 이들이다.

―조종사는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지 않나.

▷고등학교 3년 동안 탈춤 동아리 활동을 해 하체가 튼튼했다. 물론 구보 뛰는 것은 힘들었다. 생도 시절을 포함해 조종사 훈련은 남녀 차이를 두지 않는다. 남자 동료들의 속도를 따라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 극복했나.

▷죽도록 달리기 연습을 했다. 생도 시절 4년 내내 거의 매일 한 시간씩 뛰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나 비행훈련을 할 때에도 무조건 달렸다.

―여성 조종사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내가 그때 그 위치에 있었고,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기회를 준 공군이 있었기에 내가 그런 타이틀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최초' 타이틀이 있지만 나만의 능력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료들과 교관님 등 수많은 이들과 함께 이뤄낸 성과다.

―여성 조종사로서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조종사로서 힘든 점은 남녀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결혼 후 출산을 하고 나니 남자 동기들과 차이가 생기더라. 남자 동기들은 계속 비행을 했지만 나는 그 기간만큼 비행을 쉬어야 했다. 그때 약간 억울했다.

―어떻게 차이를 좁혀나갔나.

▷아들이 둘이지만 두 번 모두 출산휴가만 3개월을 다녀왔다.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아 바로 조종대를 잡을 수 있었다.

―육아휴직은.

▷아이가 아프거나 힘들어할 때 쓰려고 계속 남겨놓았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육아휴직을 안 해도 될 만큼 아이들이 잘 자라줬다. 물론 시부모님의 헌신이 있었다. 대구 청주 서울 등 근무처를 옮길 때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시어머님이 같이 다녀주셨다. 막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내가 데리고 있다.

―많이 바쁠 텐데,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나.

▷둘째가 운동을 좋아해 같이 축구도 하고 캐치볼도 한다. 첫째는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 연주를 좋아한다.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옆에 나란히 앉아 따라 치곤 한다. 가끔 누가 더 잘 치는지 '배틀'이 붙기도 한다. 12년 가까이 주기적으로 캠핑도 하면서 아이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어머니가 되고 싶은가.

▷나를 믿어주고, 아이들과 말이 통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남편도 조종사 출신이다.

▷현재는 민항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남편이 내 진로를 위해 전투기 조종사를 포기하고 민항사로 간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어 조금 억울하다. 남편은 나보다 자유로운 성향의 사람이다. 엄청 고민하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향한 듯하다.

―'여성 최초 대대장'이라는 타이틀을 추가했다. '최초 여성'이란 수식어에 대한 부담은 없나.

▷'최초 여성'의 부담감을 느끼는 단계는 조금 지난 것 같다. 처음에는 앞만 보고 나갔다. 어느 정도 계급이 되고 보니 후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배들이 나를 그냥 보지는 않겠구나, 내가 좀 잘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솔직히 그런 부담감보다 현재 나한테 맡겨진 임무를 다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여성 최초 대대장'이라는 타이틀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대대장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임무가 더 중요하다.

―공중급유비행대대장으로서 각오는.

▷F-15K, KF-16 등 전투기와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 피스아이(E-737)에 대한 공중 급유를 비롯해 국내외 공수작전 등 임무를 수행한다. 해외 재난 지원이라든지 인도적 구호활동, 평화유지 임무도 언제든지 맡을 수 있다. 공군 전투기들의 작전능력을 확장시키고, 다양한 구조·구호작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대가 창설된 지 1년6개월 정도밖에 안 됐다. 이제 막 출발한 거라 부담이 크다. 처음부터 뿌리를 잘 다져나가도록 할 계획이다.

―성격이 털털한 것 같다.

▷예민함과는 거리가 멀다. 당장 고민하고 걱정만 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은 빨리 뒤로 제쳐 두는 편이다. 후회한다고 해서 다시 되돌리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냥 잊어버린다.

―조종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06년이다. 기장 승급을 직전에 둔 부조종사였다. 늘 비상대기를 서왔지만 실제로 출동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밤 9시쯤 비상대기 중 전남 신안군 해역에서 민간선박이 침몰했다는 사고를 접수하고 갑자기 스크램블(비상출동)이 떴다. 심야 망망대해에서 약 7시간 동안 조명탄을 투하하면서 구조작전을 폈다. 당시 선원 3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평소 훈련했던 것이 실전에서 생명을 구하는 데 발휘된 거라 매우 뿌듯했다.

―본인을 롤모델로 삼고 있는 후배 여성 장교들을 위한 조언을 해달라.

▷선배들이 여성 후배들한테 늘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다. '너희는 발자국이 없는 흰 눈밭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며 '출발선을 잘 끊어줘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여성 조종사로서 길을 처음 내딛다 보니 시행착오가 더러 있었다. 발자국이 이렇게 갔다가 저렇게도 갔다가 삐뚤삐뚤하기도 했다. 후배들은 그중 좋은 길만 보고 씩씩하게 잘 따라왔으면 좋겠다.

▶▶She is…

1978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2001년 공군사관학교 졸업 후 비행훈련에 입과해 이듬해 여군 최초 수송기 조종사로 제5공중기동비행단에서 CN―235 수송기를 조종했다. 2006년 여군 최초 수송기 정조종사가 됐고, 2015년에는 보라매 공중사격대회 공중투하 부문에서 여군 최초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여성 동기 2명과 함께 여성 최초 비행대대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주기종은 CN―235로 비행시간은 총 2600시간이다.

[부산 = 연규욱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