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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회전하는 알파벳…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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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애정만세]

조선일보

영화 ‘터미널’ 주인공 빅터 나보르스키는 미국 뉴욕 JFK 공항에 산다. 공항은 여행지만큼 특별한 공간이다. 공항에서 미국인들이 일하고 공항이 미국의 법과 시스템을 따르더라도 공항은 미국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틈’이다.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을 때 귀가하지 못한 느낌을 받는 것은 공항 때문이다.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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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위한 세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한다.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어디에서 왔습니까? 어디로 갑니까? 나도 이 세 개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보고 있던 책에 관심을 가지던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였다.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 독일. 어디에서 왔습니까? - 쾰른. 어디로 갑니까? - 광주.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출발해 한국으로 가는 브리티시 에어라인에서 만난 K는 광주 비엔날레에 초청받아 광주로 가고 있었다. K는 내가 본인이 가고 있는 나라의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호감을 표했고, 나는 호감을 받은 사람답게 그에 걸맞은 이야깃거리를 돌려주려고 애썼다. 안젤름 키퍼나 히토 슈타이얼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참았다. 그는 비엔날레에 가고 있는 미술 전문가니까. 대신 독일과 쾰른에 대해 내가 아는 이야기 중 최대한 시시한 이야기를 하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 앨범은 정말 멋지지 않나요?' '베를린의 네오쾰른이 쾰른에서 이름을 땄다고 하던데?' 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곳에서 우리의 주소는 7D나 16A 같은 비행기 좌석이다."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방랑자들'에 적은 문장이다. 나는 비행기에서의 내 '주소'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앉았던 좌석 번호들 말이다. 왜냐하면, 좌석 번호는 티켓에 인쇄되어 있고, 스마트폰 안의 항공사 앱에도 있는 데다, 나는 그 좌석에 아주 일시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질 뿐이니까. 그러니 어떤 애정도 가질 수 없었다.

자기의 주소가 '67터미널'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있다. 남자의 이름은 빅터 나보르스키. 그는 미국 뉴욕의 JFK 공항에 살고 있다. 공항의 67터미널에 말이다. 벌써 9개월째다. 손재주가 좋아 의자의 등받이를 해체해 간이침대로 만들었고, 남자 화장실에서 간이 샤워를 하며, 목욕 가운을 입고 JFK 공항을 돌아다닌다. 나보르스키의 경우에는 비행기 좌석이 아니라 터미널이 주소인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터미널' 속 상황이다.

톰 행크스가 나보르스키이다. 그는 입국심사관에게 입국을 거절당한다.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나라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나라는 있었다. 하지만 그가 비행기를 타고 뉴욕의 JFK 공항에 내리는 동안 나보르스키의 나라에는 쿠데타가 일어났고, 국경이 폐쇄되었다.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그 나라는 없는 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여권은 효력을 상실한다. 이런 경우는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갈 수 있는 데가 아무 데도 없다고 담당자가 말한다. 자신의 나라, 크라코지아로 갈 수도 없고 (국경이 폐쇄된 것뿐만 아니라 운항하는 비행기도 없다.) 공항 밖으로, 그러니까 뉴욕으로 갈 수도 없다. 그래서 공항에 있는 것이다. 담당자는 나보르스키에게 두 가지를 제공해준다. '국제선 환승 라운지에(만) 머물 권리'와 '식권'.

나보르스키가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크라코지아'라는 가상의 동구권 나라 사람으로 설정된 그는 영어를 거의 못해서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항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크라코지아의 상황을 보고 스스로 깨닫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그 후의 나보르스키는 여행 가이드북을 사서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 짐 운반 카트를 정리하고 번 동전으로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사 먹고,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 사이에 사랑의 메신저를 하고, 브룩스브러더스, 라펠라, 스와치, 디스커버리의 판매직 아르바이트에 도전하나 실패하고, 가슴을 떨리게 하는 유나이티드 항공 승무원을 만나고, 곤경에 처한 동구권 나라 사람을 도와주고, 그 일이 와전되어 공항의 영웅이 되고, 뛰어난 손재주로 공사 현장 일을 얻고, 그렇게 번 돈으로 휴고 보스에서 슈트를 사고, 그 슈트를 입고 승무원과 데이트하고….

이렇게나 분주한 나보르스키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는, 스톡홀름·멕시코시티·몬트리올·토론토·서울·홍콩·밴쿠버· 오타와… 정신없이 글자가 바뀌는 '터미널'의 운항 정보 안내판(FIDS: Flight Information Display System)을 보면서 처음으로 공항에 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가장 신기했던 게 바로 이 안내판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이렇게나 많은 도시가 있고, 하나의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사람을 옮겨놓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비행기가 운항하고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알파벳이 돌아가며 만들어내는 지명들이라 더 그랬다. 회전하는 알파벳들은 비행기의 운항 경로에 대한 은유로 보였던 것이다. 수화물이 쏟아져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도 신기했다. 캐리어를 하나씩 들어 사람이 옮겼을 텐데 옮기는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컨베이어 벨트가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눈으로 직접 보기는 처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쏟아져 나오던 다국적 다인종의 사람들….

이제 그런 아날로그식 운항 정보 안내판은 잘 볼 수 없다.('터미널'은 2004년에 만들어졌다.) 10년 넘게 리뉴얼이 멈춰 있거나 레트로풍으로 특별히 만든 공항이 아니라면 말이다. 2020년의 공항에서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안내판은 알파벳과 숫자가 돌아가며 바뀌는 기계식이 아니라 패널에서 나오는 디지털 신호인 것이다.

JFK 공항은 미국도 아니고 뉴욕도 아니었다. 미국으로, 뉴욕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門)인 동시에 어디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곳이었다.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미국인들이고, 미국의 언어를 쓰고, 미국의 법과 시스템을 따르는데 공항은 미국이 아닌 것이다. 그저 공항이다. 어디와도 다른, 자족적인 도시 같기도 한 거대한 공동(空洞).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틈'이다. 아테네 시대의 아크로폴리스 같은 하나의 '도시 국가'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방랑자들'에서 올가 토카르추크는 공항을 이렇게 묘사한다. "거주민의 수는 일정치 않으며 수시로 바뀐다. 흥미로운 것은 안개가 끼거나 폭우가 쏟아질 때,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편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려면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편이 좋다. (…) 거대한 이송 벨트 장치가 우리를 반대 방향으로 데려다 준다."

그래서 그런 걸까? 오랫동안 집을 떠났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집에 있으면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어디에도 간 적이 없는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집에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그 느낌. 공항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 시간과 공간의 어긋남이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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