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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봉감독 모친의 심정으로… 똑똑, 아파트 동의서 받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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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인테리어 공사 동의서 대행 직접 해보니

골든타임 6시를 노려라

귀가 후 늦지 않은 시간

기세 좋게 이야기 건네

신뢰감 줘야 문 열어줘

서명 공포증, 어쩌죠

주민들 경계 풀기 위해

중년 여성·대학생 등

인상 좋은 직원들 뽑아

동의서 대행 시장 쑥쑥

공동주택 공사 많아져

대행비는 10만~20만원

알바생은 시급 1만원

조선일보

지난 18일 서울 강동구 한 아파트에서 기자가 인테리어 공사 동의서에 서명을 받고 있다. 같은 동 주민 과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 조유진 기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집 초인종을 꾹 눌렀다. 딩동! 텅 빈 복도에도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일감으로 받아온 서류철이 초인종 카메라에 찍히도록 높게 들었다. 입꼬리를 올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안에서 기척이 없다. 문을 두드렸다. "계시나요? 계세요?"

역시 무반응. 옆집으로 돌아서는데 문 안쪽에서 희미하게 "누구세요?" 소리가 들렸다. 딸깍. 문이 열렸다.

"새댁이에요? 이번에 이사 왔나?" 50대 여성이 젖은 고무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저녁밥 짓는 냄새와 함께 온기가 흘러나왔다. '결혼이라뇨.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을 뿐이에요'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다다음 주에 3층에서 내부 공사를 해요. 서명을 받으러 왔습니다"였다. 서류철을 내밀었다. 한 명 채웠다.

'오스카 4관왕' 봉준호 감독도 시작은 이렇게 미미했다. 첫 장편 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촬영할 땐 어머니에게도 부탁했다. 1990년대 말 서울 송파구 방이동 대림아파트에 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이다.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아들이 이 아파트에서 영화 찍는데 이 동의서에 사인 좀 해주세요" 하더란다. 봉 감독 모친은 그렇게 수십 통의 동의서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아무튼, 주말'이 아파트 동의서 받기 체험에 도전했다. 영화 촬영 동의서는 아니다. 요즘은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이웃에게 동의서를 대신 받아주는 대행업체가 생겼다. 지난 18일 오후 어느 대행업체의 아르바이트생(시급 1만원)으로 일해봤다.

동의서 받을 때 '골든타임'이 있다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동의서 의뢰인은 A동 308호. 거실 확장 공사를 하는 젊은 부부라고 했다. 저녁 6시부터 일을 시작했다. 아파트 가장 꼭대기인 19층에 올라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대행업체 박근태 실장은 몸도 마음도 바빴다. 그는 "주민들이 귀가하는 6시가 동의서 받기 제일 좋다. 8시가 넘으면 욕부터 나온다고 봐야 하고 7시만 넘어가도 싫어한다"며 "딱 한 시간이 골든타임"이라고 했다.

"그냥 알아서 이름 쓰고 사인하세요."

문을 연 70대 남성은 낯선 사람이 귀찮은 듯 말했다. "저 제가 성함을 모르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매몰찬 거절에 기가 죽었다. "당당하게 하세요. 웅얼거리면서 말하면 문 안 열어줍니다. '저 이 집 털러 왔습니다!' 하고 오는 도둑은 없으니까. 큰 목소리로 신뢰감을 줘야 의심 없이 문이 열려요." 박 실장이 말했다. "우물쭈물하다가 주민한테 '당신 뭐요? 어디서 왔어?' 혼나다가 도망친 아르바이트생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오늘 서명 목표량은 A동 187가구의 50%인 94가구. 골든타임 안에 일을 끝내기 위해 기자까지 세 명이 투입됐다. 한 사람이 1시간 동안 60가구 넘게 돌아야 한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서명 한번 부탁합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실전은 기세야, 기세!"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전국 공동주택은 2020년 2월 기준 1003만호다. 5년 전 816만호(2015년 2월)에 비해 23% 늘었다. 공동주택 입주자는 공동주택관리령 제5조 3항에 따라 관리 주체의 동의를 얻지 않고는 주택 내부의 구조물과 설비를 증설·제거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허가를 받으려면 시장·군수·구청장에게 아파트 주민 동의서 등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공동주택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인테리어 동의서 대행업체는 점점 더 바빠졌다. 대행업체는 가구 수에 따라 10만~20만원 정도 대행비를 받는다. 매일 수도권 곳곳으로 일을 나간다는 박 실장은 이사 오는 집주인이 떡 돌리는 것처럼, 공사 동의 서명을 받으러 다니며 이웃들에게 인사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 직접 도는 집주인은 적다. 인테리어 공사 업체나 우리 같은 대행업체에 맡긴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날 오후 6시부터 1시간 동안 서명받은 입주민 동의서. 호수, 이름, 서명을 적는다. /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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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공포증? 앳된 대학생이 답

문을 두드리는 왼손 검지와 중지가 아프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아기가 깰까 봐 초인종을 끊어놓거나 고장 난 집도 있어 거의 모든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빈집도 많았다. 불이 켜져 있는 집은 무조건 서명을 받아야 했다. 열려서 고마운 마음에 반갑게 서명을 부탁했지만 '나는 가사도우미라서 서명을 못 한다'는 집도 여럿이었다.

서명 자체를 꺼리는 주민도 있다. '괜히 사인해서 나중에 문제 되는 거 아니냐'는 이유다. 박 실장은 "공사를 많이 하는 아파트 주민들은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 자기도 이사 올 때 동의서를 받았으니 흔쾌히 서명하는 편이다. 동의서에 익숙지 않은 빌라나 구도심 아파트에서는 서명받으러 가면 의심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행업체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 집에는 집주인이 직접 얼굴을 비치길 권한다. 실용적인 쓰레기봉투나 음료를 선물로 들고 설득하기도 한다.

이날 함께 아파트를 돈 김현경(19)씨도 대학에 입학하기 전 두 달간 동의서 대행 아르바이트를 했다. 김씨는 "낮은 자세로 정중히 부탁 드려야 서명을 잘 해주세요.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죄송하다'고 말을 시작하는 편이에요"라고 했다. 돈을 많이 줘도 사람 앞에서 말 못 하는 성격은 못 하는 일이라고 했다.

박 실장은 "주민들의 경계심을 푸는 게 동의서 받을 때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상이 안 좋은 직원이 문 두드리면 불이 켜 있는데도 집에 없는 척합니다. 중년 여성 분이나 앳돼 보이는 대학생을 아르바이트로 많이 씁니다."

빈집은 계속 두드린다

서명받은 동의서는 구청과 아파트 관리사무소 두 곳에 제출한다.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라 내력벽, 기둥, 보, 지붕 틀, 주 계단 등 건축법상 크게 수선하는 공사는 '해당 동 입주자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대수선 외의 공사는 '동 입주자 2분의 1 이상' 동의가 필요하다. 아파트 관리규약에 따른 동의 비율은 아파트마다 다르다.

'해당 동의 50% 이상 동의'는 가장 간단한 장애물이다. 박 실장은 "입주민 80%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거나, 위·아래·옆집 인접 가구에 100% 서명을 받아오라는 아파트도 있다"고 했다. 범위가 정해진 아파트를 돌 때는 정해진 퇴근 시간이 없다. 그는 "집주인이 없으면 한 시간 있다가 다시 올라오고 저녁 먹고 또 와보고 그래도 없으면 커피 한잔 마시고 다시 두드려야죠"라며 웃었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어휴 춥겠다. 잠깐 들어와서 사인받아요." 한 주민이 저녁 시간 들이닥친 기자를 안쓰러워했다. 집집마다 초인종 누르고 다니며 밥 한 끼를 부탁하는 TV 프로그램처럼 문전박대도 각오했다.

예상 밖의 호의였다. 1시간 만에 30가구의 서명을 받았다. 셋이 모여 105가구. 으라차차, 성공했다. 택배부터 빨래 수거까지 얼굴 보지 않고 문을 사이에 두고 해결할 수 있는 시대. 아파트 동의서는 노크하고 서로 마주 봐야 하는 몇 안 남은 핑계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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