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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항생제만 있으면 된다”는 인간의 엄청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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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 내성 가진 변종 박테리아, 해마다 70만명 사망으로 몰아

'전염병 척결됐다'는 오만 반성

슈퍼버그와 맞서 싸우는 의사들, 갖가지 신약으로 반격에 나서

조선일보

슈퍼버그|맷 매카시 지음|김미정 옮김|흐름출판|392쪽|1만8000원 허벅지에 난 뾰루지를 무심코 터뜨렸다가 다리를 절단하게 될지도 모른다. 종이에 살짝 베인 상처가 덧나 죽을 수도 있다. 손톱으로 피부를 긁거나 굳은살을 뜯는 행위는 이제 나쁜 버릇이 아니라 자해 행위다. 미국에서 애완용으로 키우던 도마뱀이 귀를 핥게 놔뒀다가 변종 살모넬라균에 감염돼 희생당한 사례도 있다. 모두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항생제 내성균 탓이다.

지구의 감염병 시계를 20세기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듯 날뛰는 이 범인의 정체는 슈퍼버그. 강력한 항생제로도 치료되지 않는 변종 박테리아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7년 슈퍼버그 12종을 발표하며 해마다 70만명이 이로 인해 사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2050년엔 이 숫자가 연간 1000만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에서 슈퍼버그에 맞서 새로운 항생제 임상시험을 하고 있는 의사 매카시는 감염병과의 치열한 전투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저자가 들려주는 내성 박테리아와의 전쟁사는 오만·반성·헌신 같은 인간의 본성을 돌아보게 한다. 페니실린의 놀라운 치료 효과를 목격한 제약회사들이 일제히 항생제 개발에 뛰어든 1950년대 내내 인류는 자신만만했다. 1953년 오스트리아의 미생물학자 어니스트 자웨츠는 "세균성 질환은 더는 의료계가 풀지 못한 가장 중요한 숙제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노벨상 수상 면역학자 프랭크 버넷은 더 나아가 "전염병이 사실상 척결됐다"고 선언했다. 남은 것은 암과 순환계 질환뿐인 듯했다. 10년도 안 돼 엄청난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마치 인간의 오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박테리아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항생제를 분해하는 효소 수천 가지를 만들어 반격했다. 항생제 분야에서 이룬 눈부신 성과가 더욱 강력한 박테리아를 탄생시켜 인간을 '백약이 무효한 궁지'로 몰아가 버린 것이야말로 항생제 개발사 최대의 아이러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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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감염의 덫에서 구한 항생제가 남용되며 약에 저항력을 지닌 내성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사진은 병을 유발하는 세균을 배양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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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균과의 싸움엔 갖가지 전투 기법이 동원된다. 병사를 목마에 숨기고 적진에 들어가는 트로이 목마 전술도 활용되고 있다. 박테리아는 철분을 좋아하는데, 철분을 트로이 목마 삼고 그 속에 항생제를 숨겨 투약하면 박테리아가 달려들었다가 죽는다. 효소인 리신 연구도 내성으로 무장한 박테리아의 허를 찌르는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항생제와는 그렇게 잘 싸우는 박테리아가 자신의 세포벽을 부수는 리신 앞에서는 속수무책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엔 박테리아마다 치명적인 리신이 제각각이어서 맞춤으로 약을 개발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이 인간을 막아선다.

이 책의 큰 줄거리는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에 대해 퇴치 효과를 지닌 신약 달바반신이 미국 식품의약국(FDA) 임상시험 허가를 받은 뒤 시험 참여 환자들에게 투약되기까지 과정이다. 복합성 피부 연조직 감염증이라는 난치병에 걸린 환자들이 임상시험에 참가하며 털어놓는 저마다 인생사가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루스 할머니는 시험 동의서를 건네며 아우슈비츠에 끌려가던 날의 기억을 들려준다. 아버지가 16번째 생일날 선물로 준 빨간 구두를 아끼느라 신어보지도 못한 소녀는 구두를 침대 매트리스에 감추고 끌려갔다. 가족이 모두 가스실에서 죽고 혼자 살아 돌아왔지만 구두는 사라지고 없었다. 감정이 북받친 저자는 그녀가 달바반신이란 '신약 구두'를 신고 이번에도 생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영국인 알렉산더 플레밍과 설파계(系) 항생제를 개발한 독일인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나란히 1차 대전에 참전해 환자를 돌봤다. 항생제만 있었으면 병상을 털고 일어났을 부상 병사 수백만 명이 파상풍과 괴저, 패혈증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괴로워했던 두 사람은 전후 각자 나라에서 항생제 연구에 뛰어들었다. 특히 ‘생명 보존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은 선이고 그 반대는 악’이라는 삶의 좌우명을 붙들고 살았던 도마크는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하다 투옥되는 고초까지 겪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숙연해지고 소명이 인간을 얼마나 숭고하게 만드는지 곱씹게 된다.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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