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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밥 굶던 시절 떠올라” 14년간 순댓국 3500그릇 내어준 '나눔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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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구로구 구로4동의 한 순댓국집에 식사를 하러 온 10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앉았다. 식탁엔 방금 끓여낸 순댓국이 차려졌다. 어르신들은 익숙한듯 감사 인사를 한 후 숟갈을 떴다. "지난번에 다쳤다던 다리는 좀 어때요" "여태 아프죠 뭐" 식사하면서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어르신들은 따뜻한 믹스커피를 한 잔씩 들고 가게를 나섰다.

어르신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가게 밖으로 나가있던 이 가게 사장 김진석(61)씨는 어르신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가게로 돌아왔다. 김씨는 "가게 사장이 떡하니 앉아 있으면 식사하시는 어르신들이 불편해하실 것 같아 가게 밖으로 나가 있는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부터 14년째 매달 첫째, 셋째 주 금요일 점심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해 순댓국을 내어드리고 있다. 구로4동 주민센터와 ‘맥가이버 봉사단’에서 어르신 10여명을 모시고 오면 주문을 받아 식사를 내어 드린다. 우한 코로나(코로나19) 여파로 매출이 절반으로 줄었지만 나눔은 계속되고 있다.

조선일보

20일 오후 서울 구로구 구로4동의 한 순댓국집에 ‘나눔밥상’이 차려졌다. /구로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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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형편이 되니까 그냥 하는 거죠." 김씨의 얘기다. ‘나눔밥상’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배고픈 시절을 겪은 김씨는 어릴 적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해왔다고 한다.

5남매인 김씨는 유년 시절을 배고프게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는 "밥 굶기를 밥 먹듯 했다"면서 "학교에서 주던 옥수수가루로 죽을 만들어 배를 채웠다"고 말했다. 또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면 쌀이 떨어져 이웃한테 쌀을 얻어 먹었다고 한다. 그는 이어 "텔레비전을 보면 연예인들이 나와서 가난했던 옛날얘기 많이들 하잖아요. 그런 거 보면 지금도 좀 그래. 마음이 아파서 못 보겠더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유년 시절 가난함에도 ‘애들 눈은 뜨여줘야 한다’는 부모님 덕분에 고등학교를 나올 수 있었고, 이후에는 대기업에 취직해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침체의 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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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서울 구로구 구로4동의 한 순댓국집에 ‘나눔밥상’이 차려졌다. 이 가게 사장인 김진석씨(가운데)는 14년동안 소외된 이웃에게 총 3500여그릇의 순댓국을 대접했다. /구로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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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구조조정으로 다니던 회사를 나온 김씨는 순댓국집을 열었고 2년 뒤에는 어느 정도 가게가 자리를 잡았다. 형편이나아지니 몸이 불편하거나 행색이 추레한 이웃들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김씨는 소외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김씨는 단골손님이었던 조재화 맥가이버봉사단장 덕분에 나눔밥상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 외에도 2006년 구로동 주민센터에서 운영했던 ‘사랑의 쌀단지’ 사업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쌀을 나누기도 했다. 2012년부터는 가정형편이 안 좋은 학생들을 위한 정기후원도 시작했다. 김씨는 "억 단위 기부금을 턱턱 내놓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도움이지만 꾸준히 하려고 한다"고 했다.

김씨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이게 뭐라고 언론 인터뷰까지 하나"며 시종일관 멋쩍어 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김씨는 "봉사활동이라고 생각 안 해요. 나 좋자고 하는 일이에요. 어르신들이 순댓국 한 그릇으로 배부르게 식당을 나가시는 모습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끼니까. 그게 다예요. 기약 없이 여력이 닿는 데까지 해야죠"라며 웃어보였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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