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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청와대 행사에 대기업 총수 호출 잦아… 재계 "난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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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주요 대기업집단 총수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늘리면서 기업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구체적인 어젠다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닌데, 기업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해외출장 일정 등을 급히 조정해가면서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주재 행사에 와 달라고 하니 거절할 명분도 마땅치 않다.

대기업집단 임원 A씨는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지난 13일 서울 소공동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코로나19(신종 코로나 감염증) 대응 경제계 간담회’가 화제에 오르자 "요즘은 행사만 하면 총수 참석을 요구하는 정도인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도 이러지 않았습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청와대가 경제계 행사에 주요 대기업집단 대주주(그룹 총수) 참석을 요구하는 일이 너무 잦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지난 13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에서 최태원 SK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회장(앞줄 오른쪽부터)이 문재인 대통령 맞은 편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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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윤여철 현대자동차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이재현 CJ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 밖에 산업계를 대표해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도 참석했다.

재계에 따르면 급하게 간담회 일정이 잡히면서 오너(대주주) 경영자 일정을 조정하느라 여러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대통령 주재 행사인데다, 재계에서는 총수들이 참석하는 행사로 ‘격’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롯데는 각각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해외 출장 중이어서, 결국 전문경영인이 대신 참석했다.

사실 A씨가 이날 행사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진짜’ 이유는 원래 17일 ‘한국판 CES’의 콘셉트로 열릴 예정이었던 ‘대한민국혁신산업대전(혁신산업대전)’에서도 청와대가 총수 참석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 행사는 지난해 1월 ‘한국 전자IT 산업 융합전시회’라는 명칭으로 처음 개최했는데, 관람객이 1만700명에 불과할 정도로 흥행에 실패했다. 아예 명칭을 바꾸고 세계 최대 통신산업 전시회인 MWC(모바일월드콩그레스)처럼 스마트폰·통신 회사까지 문호를 넓히겠다는 게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계획이었다.

복수의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산업부는 이 행사에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 총수를 모두 부르겠다는 방침을 통보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개막식에 참석하는 데 그 옆에 이재용 부회장, 정의선 수석부회장(현대차), 최태원 회장, 구광모 회장 등이 서는 모습을 연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 B씨는 "혁신산업대전 첫 회의가 1월 중순에 열렸는데, 당시 한 달 뒤 행사에 4대 그룹 총수들이 모두 와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더라"면서 "기업 활동을 하는 데 실익이 없는 행사이고, 국익에 기여하는 자리도 아닌데 갑자기 행사 참석을 종용하니 뭔가 싶었다"고 말했다.

산업부는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와중에 열린 지난 3일 회의에서 혁신산업대전 개최를 강행한다는 방침을 기업 관계자들에게 천명했다. 당시 참석한 기업 관계자들은 "지금 시민이 집 앞 식당도 안 가는데, 북적거리는 행사장에 누가 오겠느냐"고 재고를 요청했다. 이후 코로나19 사태가 악화하자 산업부는 5일 오전 행사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대신 1주일 뒤에 열린 코로나19 관련 간담회에 4대 그룹을 포함한 주요그룹 총수를 부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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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삼성전자 충남 아산사업장에서 열린 디스플레이 신규 투자 및 상생협약 체결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앞줄 왼쪽부터)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부터 현재까지 청와대 언론 브리핑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기업인은 이재용 부회장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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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4대 그룹 총수가 참석한 행사를 선호하는 모습은 2017년 5월 이후 청와대 브리핑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전체 브리핑 가운데 ‘이재용’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은 총 45회이고, ‘최태원’은 33회, ‘정의선’은 23회, ‘구광모’는 14회에 달한다. 그런데 ‘김승연’은 6회, ‘신동빈’ ‘이재현’ ‘정용진’은 각각 5회에 불과하다.

동일한 안건에 대해서 브리핑이 여러 번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수 있지만,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해 4대 그룹 총수를 엮은 행사를 청와대가 선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머지 주요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등장 빈도와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가장 큰 불만을 갖는 점은 총수가 애써 시간을 쪼개 참석한 행사인데도 별다른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A씨와 B씨는 모두 "참석해 봤자 중요한 사안이 논의되지도 않고, 기업의 의견이 반영되지도 않는 자리"라며 "구체적인 어젠다가 없는 자리에 왜 총수를 오라고 하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지난 13일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의 경우 청와대는 행사 후 브리핑에서 "경제계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건의한 모든 사항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기업인들이 건의한 사항은 '중국 공장 방역 물품 지원 확대' '항공 관세 인하' 정도다. "내수 진작을 위해 회식이 주 52시간제에 저촉되는지에 대한 우려를 해소해달라"는 이재용 부회장의 건의가 그나마 화제를 모았다. 굳이 총수가 나서서 민원을 넣을 만한 중요한 사안이 논의된 자리가 아니었던 셈이다.

[조귀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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