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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관객 홀린 그림자 없는 석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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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레안드로 에를리치 `탑의 그림자`. [사진 제공 =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2층 전시장에서 경주 불국사 석가탑이 연못에 투영됐다. 물 속에서는 사람들이 걸어다녔다. 물론 착시효과였다. 1층과 2층 사이 뚫려있는 공간에 투명한 아크릴판을 놓고 물 1톤을 흘려서 인공 연못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1층으로 내려가보니 텅 빈 공간에 모조 석가탑 2개를 바닥끼리 맞붙여 놓아 그림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관람객도 드나들 수 있어 2층에서 보면 영락없이 사람이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높이 9m에 달하는 대형 작품 '탑의 그림자'가 지난해 12월 17일 처음 설치된 후 지금까지 관람객 4만여명을 홀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관람객이 40% 이상 급증한 비결이기도 하다.

흥행 마법을 부린 아르헨티나 설치미술가 레안드로 에를리치(47)는 "석가탑의 또 다른 이름인 무영탑(無影塔·그림자 없는 탑) 설화에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백제 석공 아사달이 아내 아사녀에게) 석가탑이 완성돼 그림자가 인근 연못 영지(影池)에 비추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게 매우 시적으로 다가왔다. 그림자는 사물의 존재 증거이기도 하지만 일시적이며, 관점에 따라 달라 보여 불교, 동양철학과도 통한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지친 아사녀는 영지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다. 당시 불탑 현장은 금녀(禁女) 구역이여서 아사녀는 남편과 생이별한 채 불국사 근처를 맴돌았다고 한다.

에를리치는 착시 현상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고 실재와 허상이 뭔지 묻는다. 그는 "우리는 인지 능력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오해로 이끌 때도 있다. 과거 우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줄 알았는데,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을 때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작업실까지 찾아가 무영탑 설화를 들려주고 창작 동기를 마련해준 방소연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내가 보는 세계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생간의 유연함을 갖게 하는 작가다"며 "고난위도 설치 작업이어서 관리도 정말 어렵다. 자연증발한 물을 다시 채우고 가라앉은 먼지를 청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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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안드로 에를리치 자동차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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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작품 '자동차 극장'을 설치할 때도 2층 전시장 바닥이 실제 자동차 13대 무게를 견딜지 '살얼음판'이었다. 모래를 뒤집어쓴 자동차들은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 영상이 흐르는 스크린을 부러운듯 바라보고 있다. 모래 자동차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바로 주행이다.

지난해 아트바젤 마이애미 해변에서 모래 자동차 66대를 설치했던 작가는 "타인들처럼 움직이고 싶은 욕망을 담았다"며 "모래는 시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왔다. 모래로 시간을 측정해왔고, 어릴 때 해변에서 뭔가를 최초 만드는 경험을 모래로 했다. 모래에는 창조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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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남한,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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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을 닮은 조각 '구름(남한, 북한)'도 관람객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작품이다. 남한과 북한 지도 형상에서 영감을 받아 구름을 그린 유리판 11개를 각각 겹친 이 작품은 실체의 '경계 없음' 혹은 '무상함'을 보여준다. 바람 따라 흩어졌다 모이며 형태가 만들어지는 구름처럼 국가 운명도 주변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남한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은 북한과 관계에 영향을 받아왔다.

건축가 아버지와 형, 숙모 영향을 받은 작가는 착시효과와 환영을 활용한 다양한 설치 작품들을 전시장에 펼쳐놨다. 엘리베이터 4개가 붙은 구조물 속 거울을 들여다보자 건너편 엘리베이터 사람이 보이는 '엘리베이터 미로', 블라인드 틈을 통해 다른 집들을 훔쳐보는 듯한 경험을 주는 '더 뷰', 정원을 들여다보자 자기 얼굴이 보이는 '잃어버린 정원' 등이 혼란과 동시에 재미를 준다.

작가는 "내 작품을 초현실적이라고 하지만 현실의 질서를 다루고 있다. 익숙한 공간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더뷰'는 남을 훔쳐보는 관음증 같지만 결국 타인에 대한 관심과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10대 시절에 아버지가 소장한 영화 테이프 1000여개를 돌려보면서 자란 그는 대표작 이미지로 영화 포스터 13점을 제작한 작품 '커밍 순'도 전시장 벽에 붙여놨다.

에를리치는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수영장 안과 밖의 사람들이 마주 보게 하는 설치작품 '수영장'을 선보여 세계 미술계 시선을 끌었다. 전시는 3월 31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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