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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매경데스크] `명백한 신호`를 놓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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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미래에 대한 통찰과 실천을 강조한 책 '포사이트(Foresight)'의 서문에는 저자의 안타까운 경험담이 담겨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출신이자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인 비나 벤카타라만은 허드슨강 인근에 하이킹을 갔다가 진드기에 물렸다. '틱(tick)'으로 불리는 이 진드기에 물렸을 때 1~2일 내로 병원 치료를 받으면 별걱정은 없다. 하지만 치료 시기를 놓치면 라임병에 걸려 근골격계 통증이나 신경계 증상에 오랫동안 시달릴 위험이 있다.

벤카타라만은 "다리에 붉은 발진이라는 '뚜렷한 흔적'이 있었는데도 곧바로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아 큰 고통을 겪었다"며 그건 '내가 설마 라임병에 걸리랴' 하는 착각 때문이었다고 자책했다. 그는 "누가 봐도 경고 신호가 명백한데 사람들은 종종 무모하고 경솔한 결정을 내린다"고 진단했다. 벤카타라만은 로마제국 최악의 자연재해라고 할 만한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예를 들었다. 17년 전 그 일대에 심각한 지진이 일어난 데 이어 초대형 화산 폭발이 있기 몇 주 전에도 땅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 징후를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무런 대피 계획이 없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고대도시 폼페이가 유독가스와 화산재에 휩싸인 채 최대 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급증으로 온 국민이 패닉에 빠졌다. 23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무려 600명을 넘어섰다. 일주일 전인 17일만 해도 확진자 수는 30명이었다. 한국은 졸지에 세계 두 번째 코로나19 오염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지난달 중국 춘제 전후로 여러 전문가들이 '대유행'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고 신천지 대구교회 사태가 불거지면서 '명백한 위험 신호'가 포착됐지만 정부는 계속 특단의 대책을 주저했다.

급기야 전국 시도가 다 뚫리자 대한감염학회 등 의료계가 22일 입장문을 내고 감염병 위기 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권고했는데도 이날 정부 측은 "지역사회 감염 전파의 초기 단계"라면서 경계 단계를 유지한다고 밝혔다. 확진자가 연일 세 자릿수로 급증하자 23일에야 심각 단계로 올린 건 '뒷북 대응'이라 할 만하다.

이제 확진자 1000명을 넘는 건 시간문제다. 이 와중에 중국인 유학생 수만 명이 1학기 개강을 앞두고 입국을 시작했다. 대학들이 아무리 자가격리를 유도한들 이들을 완벽히 통제해낼 방법이 없다. 결국 캠퍼스 확진자가 무더기로 발생하고 중국인 유학생을 한데 모아놓은 대학 기숙사가 또 하나의 '슈퍼 전파거점'으로 전락할 개연성이 크다. 한국은 유럽 등 여러 국가에서 '입국금지' 조치를 당할 수 있다.

이런 비관적 시나리오가 현실이 돼선 안 되겠지만 최근의 심상찮은 양상을 지켜보면 그러지 않으리라는 장담도 못하겠는 게 필자의 솔직한 생각이다. 정부의 대응 속도가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를 빨리 '종식'시킬 대응책을 갖고 있는지, 중국인 입국금지와 같은 강경책을 일찍 택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조바심이 든다. 의료계에선 '고위험군'의 유입을 가급적 차단하는 게 방역의 기본이라고 강조하지 않나. 중국은 코로나19 대혼란에 빠져들고 나서야 14억 인구의 절반가량을 이동제한(자가격리 포함) 조치하는 초강경 대책을 꺼냈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초동 대처에 실패한 대가로 중국 국민이 너무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미래를 어떻게든 예측하려 한다. 보다 현명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중요한 건 강력한 예측과 명백한 위험 신호를 놓쳐 제때 대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허사다.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을 경솔한 의사 결정을 막자는 것, 그게 벤카타라만 교수가 쓴 책의 결론이다.

[황인혁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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