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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02] 지금 여기가 맨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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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이문재(1959~ )

남녘에는 매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는 땅의 저 아래 끝자리를 남녘이라고 부릅니다. 그 자리에 매화가 먼저 피었으니 봄으로서는 맨 앞자리인 셈입니다(봄은 또 어딜 다녀온 걸까요. 바람이라도 났던 모양입니다!). 봄을 맞아 나무는 끝자리에서부터 싹이 돋아 자라 나갈 겁니다. 끝자리에 맺혔던 꽃봉오리가 만발하면 벌이 모여 일대 잔치마당이 될 겁니다. 부러지기 쉽고 하찮아 보여 ‘끝자리’라고 부릅니다만 그 자리가 핵심입니다. 그 자리에서부터 봄은, 나무들의 한 해 성장은 시작되지요. ‘맨 앞’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요. 나무를 한 나라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우리 백성 개개인 모두가 나라의 끝자리고 꽃자리들입니다. 실뿌리이고 가지 끝입니다. 거기에 물이 가야, 거기에 신명이 깃들어야 나라가 있습니다. 과수원을 지나노라니 가지치기가 한창입니다. 엇나간 가지들, 이웃을 침해하는 묵은 가지들은 과감히 쳐냅니다. 시원하고 밝아집니다. 그래야 열매 맺을 가지들이 힘을 얻습니다. 성장점, 그러니까 ‘맨 앞’이 어디인지, ‘정면’이 어디인지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봄의 시작이겠죠.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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