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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만났습니다]①이어령 "'기생충'은 놀라운 역전극…'햇빛문화' 정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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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문화부 장관 지낸 '문화 아이콘'

'한류'가 쌓여 '기생충' 결과 낳아

"한국 문화, 세계 경쟁력 뒤처지지 않아"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1988년 서울 올림픽때 굴렁쇠를 굴리며 ‘벽을 넘어서’라고 꿈꿨던 것이 이제야 이뤄졌다. 옛날에는 외화를 팔아서 영화사(투자배급사)들이 돈을 벌었는데 영화 ‘기생충’이 거꾸로 미국에서 아카데미 상을 탔으니 그야말로 역전극이다. 세상을 놀라게 했던 ‘한류’가 쌓여서 ‘기생충’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학자, 언론인, 소설가, 행정가, 비평가 등 60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이력은 다채롭고 화려하다. 이름 앞에는 으레 우리 시대의 석학, 대표 지성, 문화계의 거목 같은 수사가 따라붙는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88) 이화여대 석좌교수 얘기다.

이 교수가 장관을 지낸 지 30여 년 만에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기생충’이 지난 10일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국제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하며 4관왕에 오른 것이다. 한국 영화인 ‘기생충’이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 이어 다시 한번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기쁨을 함께했다.

21일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렇게 선전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는데 정말 기쁜 일”이라며 “영어가 아닌 한국말이 세계에 통했다는 점에서 언어의 승리다”고 평했다.

이데일리

간암투병 중인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21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영화산업이 꾸준히 성장을 하면서 투자자도 생기고 많은 여건이 달라졌다”며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하는 문화 콘텐츠가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인터뷰 당시 이어령 교수(사진=이데일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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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기생충 위해 문화저변 넓혀야”

그는 수십 년간의 저술 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88올림픽 당시 최고의 히트작이자 명장면인 ‘굴렁쇠소년’을 기획한 사람이 당시 개막식 총책임자였던 이 교수였다. ‘기생충’의 출연배우인 이선균, 박소담, 장혜진 등을 비롯해 이하준 미술감독 등을 배출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문화부 장관 재임 시절 설립한 한국예술종합학교(1992년 개교)가 이제는 세계적인 예술인들을 길러내는 집합소가 된 것이다.

“옛날부터 가무악(歌舞樂)은 중국이나 일본이 아무리 해도 못 따라오는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다. 우리 영화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극본 같은 문학적 콘텐츠였는데 ‘기생충’이 각본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정말 자랑스럽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상투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메시지를 다루는 방법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고 본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도 ‘아카데미 시상식’과 같은 권위 있는 영화상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이 알아주니까 인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정하는 콘텐츠가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남이 인정하면 따라가는 ‘달빛문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남이 비춰줘야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따져야 할 것은 남이 인정하기 전에 반대로 우리가 남의 것을 인정하는 ‘햇빛문화’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변두리에서 중앙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그는 영화산업의 저변이 넓어져야 ‘제2의 기생충’도 나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에베레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 될 수 있었던 건 히말라야 산맥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평지에서 혼자 우뚝 설 순 없다”며 “‘기생충’이 있기까지 존재했던 독립영화와 같은 수많은 작은 산맥들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소한 일들이 기쁨 주더라”

현재 그의 건강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2017년 간암 4기 판정을 받은 이후 항암·방사선 치료 대신 글쓰기를 선택하며 인생을 마주하고 있다. 최근 신간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한 이후 개별적인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으나, 모두 거부해오다가 제한적으로 수락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떠오른 건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탄생’이었다. 그는 한국이 ‘저출산 국가’에 이어 낙태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음을 안타까워했다. 이 교수는 “‘너 어디에서 왔니’라고 물어보면 의외로 한국인의 기원에 대해 우물쭈물하는 이가 많다”며 “사실 우리나라에는 자랑스러운 문화가 많이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일본이나 인구가 10억인 중국이 못하는 일들을 우리는 해내고 있다. 축구로는 세계를 평정하지 못해도 방탄소년단(BTS)은 세계를 제패하지 않았나. 막춤에서 비롯된 싸이의 ‘말춤’이 전 세계를 열광케 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영화 ‘기생충’이 또 하나의 문화로 우뚝 섰다. 한국인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한 경쟁력에서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이 교수는 삶에서 기쁨을 주는 건 ‘사소한 일들’이라고 강조했다. 삶의 아주 작은 가치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죽음’이다. 딸과 외손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극한의 슬픔을 맛봤다. 아버지가 됐던 최초의 기쁨에서부터 남들에게 칭찬받았던 일 등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암 선고를 받은 이후 ‘기뻤던 일과 아쉬웠던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내 생에서 가장 큰 기쁨과 슬픔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었다.”

◇이어령 교수는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1956년 서울대 국문과 학사 △1960년 서울대 국문과 석사 △1987년 단국대 국문학 박사 △서울신문·한국일보·경향신문·중앙일보 논설위원 △이화여대 문리대학 교수 △‘문학사상’ 창간 주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연출 △초대 문화부 장관 △이화여대 석좌교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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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사진=이데일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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