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4 (화)

권여선 소설가 "슬픔의 마에스트로는 과한 수식어…차라리 슬픔의 피에로 되고 싶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기약한 시간을 반 시간 앞두고 유리문을 밀었지만 중앙 테이블에 반쯤 남은 맥주병부터 눈에 띄었다. 김치와 나물들, 밑반찬만으로도 술을 반병쯤 비우기엔 부족함이 없다는 듯이 권여선 소설가(55)는 가만하고 꼿꼿한 자세로 잔을 털어넣던 참이었다. 마치 어떤 의식(儀式) 같았다.

불콰해지다가 지리멸렬해지는 이 시대의 술자리 삽화를 소설 곳곳에 배치해 '주류(酒類) 문학의 성좌'로 추앙받은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와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는 독백에 취하는 안주 산문집 '오늘 뭐 먹지?'로 주당 인생을 '커밍아웃' 했던 그가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을 새로 냈기에 단골집에서 만남을 청했다. 야속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미리 와서 몰래 마시는 '경건한 10분'을 방금 방해받았다"며 깔깔 웃는 그에게 주문(呪文)을 걸듯 소주와 맥주를 천천히 섞어 건네며 한낮의 단골 소줏집 인터뷰를 시작했다.

"옛 소설에서 고통은, 본인이 바꿀 수 없는 운명이나 기질에서 초래되는 비극의 불행이었어요. 이번 소설집의 시선은 운명이 아니라 구조랄까. 주어진 조건들이 그악스러워졌고 고통받는 인물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무방비로 당하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구조의 잔혹성이 사람들을 슬픔으로 밀어넣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알코올 기운이 현저히 줄어든 이번 소설집은 그렁그렁했던 두 눈이 안광을 되찾아 좀 냉정해져 버린 구석이 있다. 고통 그 자체에 접안하지 않고 불행을 잉태한 구조를 더듬어서다. 두 번째로 수록된 단편 '손톱'이 그렇다. 생계라는 절벽에 내몰린 20대 판매직 여성의 손톱이 아물기를 기다린다. 약자에겐 죄가 없다. 약자는 무죄다. 두 번째 잔을 '원샷' 하며 말을 이었다.

"백지은 평론가가 '이번 소설집에서 슬픔은 공감보다 책임감일 것이다'라고 해설에 쓰셨어요. 그래요. 아무래도 분노에 집중하고 싶어집니다. 다만 분노와 책임감 저편에는 어쩌면 '무력한 눈물'이 깔려 있습니다. 삶을 고발하겠다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어요. 과거엔 어떤 전망 속에서 쓰기를 의도했다면 지금은 무력감 속에서 삶을 직시하는 것이랄까…."

매일경제

뭔가가 영원히 지나가버린 듯한 감각이 소설에서 변주된다. '이미 사라져 버렸고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고 영영 지울 수도 없으리라고'(29쪽, '모르는 영역')라는 문장이나 '아주 오래전 언젠가도 이런 상태로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리며 앉아 있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92쪽, '희박한 마음')는 문장은 곰곰이 따져 보면 같은 말이지 않을까.

"제 나이 정도가 되면, 많은 게 지나가 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지나간 건 끝남으로 종결되지 않고 회귀하며 또 출몰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돌아오는가'가 중요해지죠. 출몰하는 것과 회귀하는 것이 지금의 '나'를 말해줍니다. 과거라는 건 무서운 타자, 이방인, 씻을 수 없는 얼룩이에요. 출물과 회귀를 응시하며 남는 질문은 이런 게 아닐까요. '무엇이 나에게 영원히 각인되어 있는가.' 아무래도 그것은, 잊지 못한 상처일 수도 있고…."

오래전 어느 자서에 스스로 밝혔듯이 권여선 소설가는 '글로써 구하는 용서'로서 소설을 써왔다. 젊은 날에 느낀 모친에의 미안함일 수도 있고 먼저 떠나보낸 친구에의 안타까움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본명인 '권희선'을 다독이면서 소설가 권여선은 평생을 그렇게 써왔다. 불행을 견디던 시절을 지나 소설가로 살아온 삶은 어떨까. 잔은 어느덧 '생소주 알잔'으로 바뀌었다.

"삶을 총동원해 쓰면서도, 고통의 체험에 적극적이지도 실험에 가까운 불행을 미리 맛보려 하지도 않아요. 삶도 중요하니까요. 즐기는 순간엔 소설이 안 되고 발버둥칠 때는 삶의 우울한 시기이니 소설과 삶은 양립 불가하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지금요? 글쎄, 빠져나오긴 했는데 다시 들어가기는 싫어 징징거리고 있는 상태? 맞아요, 오늘처럼. 하하…."

일견 유쾌해 보이지만 1996년 문단에 나온 뒤로 그는 고통의 도수가 점점 짙어져 왔다. 그에게 '슬픔의 마에스트로'란 수식어가 헌정된 이유였겠다. 거장과 전문가를 뜻하지만 슬픔을 그처럼 '이해'하는 소설가도 드물 것이다. "언젠가부터 '작가의 말'을 쓰기도 힘겹고 내 소설 얘기하기도 숨이 가빠 오늘이 생의 마지막 인터뷰일지도 모른다"며 웃는 그에게 '슬픔의 마에스트로'를 물었다. 긍정일까 부정일까.

"과함 때문에 '마에스트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자꾸 폼을 잡게 되는데 되레 힘 빼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차라리 저는 슬픔의 피에로가 되겠어요. 죽을 힘 다해 쓰지 않고 힘을 뺀 피에로. 웃겨야 하면서도 자신은 슬픔을 느끼는 어릿광대. 잠깐, 그러면 이번 책에서 단편 '손톱'을 피에로적(的)으로 쓰면 또 어떻게 쓰려나…. 군침 도는 자문(自問)인데…. 에잇, 아닙니다. 양껏 술이나 마십시다."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권여선 소설가 '아직 멀었다는 말' 인터뷰 전문(全文)

―오늘 인터뷰는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와 장편 '레몬'에 이은 세 번째 인터뷰로, 신간 너머 그간의 변화를 되짚는 대화가 이어지길 소망한다. 가벼운 질문부터 드리자면 표지는 마음에 드시는지. 먼 강을 지나는 기차가 아직 절반만 지난 상태라는 점, 그러나 분명하게도 저편을 향해 가는 중이란 점에서 어떤 은유를 발견하게 되는데. 아울러 표지에 얽힌 비화(秘話)가 있다면.

▷파스텔톤 표지는 처음인데, 꼭 마음에 든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 몰랐는데 실물 보니 마음에 들었다. 다만 책이 나오면 꼭 표지의 비화에 관한 질문이 나온다. 그러나 정말 아무런 비화도 없는 표지는 처음이었다. 바로 좋다고 했다.

―2016년작 단편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와 달리 이번 책에서는 술(酒)이 거의 사라졌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두 소설집 사이에서 가장 크게 바뀐 지점이다(웃음). 팍팍한 상황을 일부러 의도하진 않았는데, 알콜기가 빠지다 보니 문장도 좀 팍팍하게 진행된 것 같다.

―'안녕 주정뱅이'는 "운명의 악의적인 농담"(신형철 평론가)의 느낌이 강했다. 외부나 타자로부터 생에 틈입하는 사건과 상황은 우연적이어서 악의와 농담이라는 삶을 불순물이 끼어드는 느낌이었다. 이번 소설집은 "부당함, 불공정, 불평등"이자 "가학적인 환경에 노출된 약자"(백지은 평론가)로 이해된다.

▷'안녕 주정뱅이'는 운명이라든가 본인이 바꿀 수 없는 성격, 도는 기질에서 초래되는 비극적인 불행에 가까웠다. 이번 소설집에서 말하는 건 운명이 아닌 구조이다. 주어진 조건이 그악스러워졌다고 할 수 있겠다. 불행을 인지하는 '안녕 주정뱅이'와 다르다. 고통 받는 인물은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방비로 당한다.

―그동안 몰이해됐던, 구조에 대한 새로운 눈뜸일까.

▷초기 소설에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의도의 저변에 깔려 있었지만 관철되진 못했다. 후일담 소설이라거나 1980년대 문학의 잔여(殘餘)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은 이유이겠다. 의식이 강해도 직접 녹여내서는 안 되다 보니 후일담 방식이 나온 것 같다. 이제 와서는 잔혹한 '구조'라는 게 사람들을 '말아넣고' 있는 건 아닌가를 생각한다. 구조를 인지하니 관찰이 되어지고, 또 들여다봐지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삶을 고발하겠다는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무력감을 갖고 쓰게 된다. 과거엔 어떤 전망 속에서 쓺을 의도했다면 지금은 무력감 속에서 삶을 직시하는 것이겠다.

―해설에서 백지은 평론가는 이렇게 쓰셨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부정을 대신 겪어내는 누군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이번 소설집에서 타인에 대해 느낀 슬픔은 공감보다는 책임감일 것이다···." 슬픔과 분노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린다.

▷책임감 또는 분노에 집중하고 싶다. 다만 책임감까지 나아가는 건 좋은데 무력한 눈물이 깔려 있다. 무력한 분노의 단계에서 작품을 쓰고 있고, 지금도 그런 상태에서 고민한다.

매일경제

―두 소설집 사이에 놓인 4년의 시간, 소설가로서 변화를 체감한 순간은 언제일까.

▷변화하고 싶기는 한데 이렇게 변화해야지 싶어서 바뀌는 변화보다는, 변화하려는 눈이 없으면 변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쓰는 편이다. 또 문장도 바꿔보려고 하는 편인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게 있어 변화를 직접 의도하진 못하는 것 같다.

―첫 번째로 수록된 소설 '모르는 영역'에서 낮달의 의미는. 왜 아침달, 낮달, 저녁달이 아니고 모두 낮달일까.

▷삶이라는 건 언제나 해 중심적이다. 아침달, 낮달, 저녁달이라고 하지 않고 낮에 뜨면 이상한 달이라고 여겨 낮달이라고만 부른다. 낮에 뜨는 달에게는 이름을 섬세하게 붙이지 않는다. 관계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이해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저 질문은 명덕의 반성이 살짝 개입된 말이다. 해 입장에서 모를 수도 있겠다는 의미다.

―명덕의 일시적인 실명(失明)은 왜일까.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단편 '역광'에서도 위현 선생은 눈이 멀은 인물이었다. 실명은 어떤 함의일지.

▷감각에도 순서가 있다면 눈으로 본다는 것은 몇 번째일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볼 수 없음은 너무나 거대한 슬픔이다. 본다는 감각을 상실한다고 상상하면 내게는 읽지 못함이 쓰지 못함보다 더 치명적이다. '모르는 영역'의 명덕의 보이지 않음과 '역광'의 위현의 실명 상태는 소멸로 향해 나아간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짧은 순간에 뭔가가 지나가버렸다는 느낌이 변주된다는 느낌이다. 단편 '모르는 영역'과 단편 '희박한 마음'이 그러했다. 뭔가가 지나가버렸다는 느낌을 자주 가지실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나이 정도가 되면 많은 게 지나가버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끝나거나 사라져버린 건 아니고 그저 지나가버린 거다. 지나가버렸던 것들은 끝남으로 종결되지 않고 회귀하거나 출몰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건 무엇이 돌아오는가다. 아주 오래 전에 지나가버렸지만 다시 출몰하거나 회귀하는 그 무엇이 현재의 자신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상처일 수도 있고, 가만히 있었는데도 현재를 사로잡아 버리는 예측 불가했던 과거일 수도 있다. 소설을 쓰며 나는 이미 지나가버렸던 것이 가진 힘과 효과를 생각한다. 출몰과 회귀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런 거다. '무엇이 나에게 영원히 각인되어 있는가.' 소설을 쓴다는 건 저 질문의 변주이지 않을까.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나 문장을 하나만 꼽아주신다면.

▷제목인 '아직 멀었다는 말'이 바로 하나의 문장, 하나의 키워드가 될 것 같다. 책 홍보는 아니다(웃음). 저 말이 주는 이중적 뉘앙스가 내 소설의 상태인 것 같아서다. 아직 멀었으니까 곧 도착할 수 없다는 절망과 그러나 분명하게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희망이 섞인 말이겠지. 아직 멀었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멀었음에도 지금 가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희망과 절망이 섞인 말이다. 물론, 그곳이 그곳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 다른 질문을 이어가본다. 어떤 소설가 분께 듣기를 "자전소설은 내 살 파먹는 것 같아서 절대 쓰지 않는다"는 입장이 있고 또 다른 소설가 분은 "그 어떤 불행을 겪더라도 '괜찮아 이것도 소설로 쓰면 돼'라고 생각하면서 불행 그 자체를 관조하고 된다"는 속내를 접한 적이 있다. '소설가 권여선'은 어느 쪽일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죽도 밥도 아니다(웃음). 삶을 총동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럼 의도에 거부감도 있다. 다만 이것만큼은 명확하다. 어떤 불행을 당하더라도 고통의 체험에 적극적이지는 않다. 소설도 중요하지만 나의 삶도 중요해서다. 소설을 위한 실험에 가까운 불행을 미리 맛보려 하지는 않는다. 과도하게 모험적이지도, 그렇다고 자폐적이지도 않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소설과 삶은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즐기는 순간엔 소설이 안 된다. 알려고 발버둥치고 할 때는 소설이 쓰여지는데 그때는 삶의 우울한 시기다. 둘의 교차 편집이 이어진다.

―두 감정의 넘나듦이 쉽지 않겠다.

▷넘나들다가 아무것도 못하곤 한다. 살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 그럴 때마다 나름의 '루틴'을 마련하려 했다. 사흘을 술을 마신다든가 아니면 운다든가. 한 편을 마치고 나면 빠져나오려 노력은 한다. 지금은 빠져 나와 있는 상태이며, 그러나 다시 들어가기 싫어서 '징징거리고' 있는 상태라고 봐주시면 정확하겠다(웃음).

―이번 소설집 '작가의 말'에서 "모르겠다"는 말을 되풀이 하셨다. 또 "마지막 작가의 말이길 바란다"는 말씀도 남기셨다. 이유가 궁금하다.

▷'작가의 말'에 대한 회의가 많다. 소설 외에 뭘 또 말해야 하나 싶은···. 안 쓰려다 썼지만 항상 독자를 생각해 쓰는 게 있긴 하다. 타협하지만 그래서 괴팍스러워진다. 책을 낸다는 건 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다. 일곱 편, 여덟 편 쌓이면 책을 내는데, 책을 내는 시기에는 목적이나 의도가 없으니 말이다. 흐름이 묶이는 것일 뿐인데 되돌아보면 남겨뒀던 '작가의 말'이 괴로워진다.

―뭔가를 부연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래서 사실은, 이제는 인터뷰도 하기 싫어진다(웃음). 내 소설을 설명하려니 인터뷰가 힘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 인터뷰가 내 인생의 마지막 인터뷰일지도 모른다. 괴팍스러워지는 면을 통제하려 하는데 나중엔 또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번 '작가의 말'에서 어조가 완전히 바뀌는 지점이 있다. 그 부분은 확실히 달리 읽혔다.

▷나머지는 모두 원고지를 메우기 위한 말 같고, 그것만이 진심인 것 같다(웃음). 읽어주는 독자가 있음에 감사하다. 그래서 책에 썼듯이 나는 식어 차고 독자들은 따뜻했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든다. 독자들은 언제나 눈물겹다.

―아주 조심스러운, 마지막 질문이다. 백지은 선생님 해설 첫장에 "슬픔의 마에스트로"라는 단어가 나온다. 작년 '레몬' 인터뷰 당시 독자의 마음을 담아 기사에 담은 은유였다. 슬픔을 다루는 소설가라는 은유, 어떻게 보실지.

▷그런 걸 내가 잘 한다면 놀라운 일이지만 과함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삼인행' 같은 단편이 마에스트로 발가락 끝 정도에 가는 건데, 예전에는 잘 썼다고 생각하다가도 갈수록 혐오하게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꾸 진지해지는 것 같고 폼을 잡게 되는 것 같아서다. 더 힘을 빼고 가야 한다. 스스로의 다짐이다. '슬픔의 마에스트로'가 아니라 '슬픔의 피에로'가 쓺의 목표이겠다. 거장의 경지를 향해 죽을 힘 다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힘을 뺀 피에로가 되고 또 그렇게 기억되길 바란다. 이렇게 결론을 내겠다. '슬픔의 마에스트로는 나에 대한 멸칭(蔑稱)이요, 내가 생각하는 바는 오직 슬픔의 피에로다'라고(웃음). 웃겨야 하면서도 슬픔을 느껴야 하는 피에로, 나는 '슬픔의 피에로'가 되고 싶다. 그러면 또 이런 생각도 하게 되는데, 이번 단편 '손톱'을 피에로적(的)으로 쓰면 또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니다. 술이나 마십시다.

[김유태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