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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5 (수)

“세계 노동운동사는 수많은 실패로 이룬 승리의 역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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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금수 명예이사장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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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 원로인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에게는 또 다른 직함이 있다. 바로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상임고문이다. 회원이 60여 명인 이 연구회는 6년 전 사단법인 등록도 했다. 김 이사장이 2007년부터 이끄는 세계노동운동사 학습반 참가자들이 주축이다. 6기까지 나온 수료생 중에는 김명환 현 민주노총 위원장도 있다. 연구회는 지금도 한 달에 한번 만나 학습한다. 김 이사장이 미리 작성한 원고를 읽고 토론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발제한다. “세미나에서 하는 공부가 진짜죠. 발제문을 읽고 질의하고 토론합니다. 답변은 (참석자 중) 선수들이 하고 저는 지켜만 봅니다. 마지막에 총괄은 제가 하고 뒤풀이하죠. 고민하고 토론하고 학습하고 실천해야죠. 그런데 요즘 노조운동가들은 참 공부 안 합니다. 절감해요.”

김 이사장이 최근 완간한 3900쪽 분량의 <세계노동운동사>(전 6권, 후마니타스)의 토대가 바로 이 세미나 원고다. 2013년 1·2·3권 출간에 이어 최근 4·5·6권을 마무리했다. 17년 집필의 대장정을 마친 것이다. 21일 서울 충정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실에서 저자를 만났다.

이 거대한 저술의 출발은 2001년 옛 한국노동교육원이 내던 계간지 <노동교육>과의 만남이었다. “<노동교육> 기자가 ‘인물로 본 노동운동사’ 연재를 제안했어요. 그런데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1848년 혁명이나 파리 코뮌은 중심인물이 없어요. 그래서 자료가 부족하지만 아예 세계노동운동사를 쓰기로 했죠.” 그는 참여정부 시절 노사정위원장으로 있던 3년을 빼고는 지난 17년을 세계노동운동사 집필에 바쳤다.

한겨레

책은 단순한 세계노동운동사가 아니다. 차라리 자본주의 태동 이후 지난 500년 세계민중운동사에 가깝다. 16세기 이후 진보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1848년 혁명이나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68혁명 등의 전개 과정을 치밀하게 짚고 학계의 논의나 평가도 보탰다. 더 놀라운 것은 선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는 물론 라틴과 아프리카 국가까지 모두 39개 나라의 노동운동사를 구분해 상세히 들여다본 점이다. 예컨대 40쪽이 넘는 6권 칠레 편에선 노동운동세력이 중심인 아옌데 인민연합정부의 집권 과정과 주요 정책은 물론 군부 쿠데타로 무너진 과정까지 상세히 기술했다. 1·2·3권은 자본주의 발생과 노동자 계급 형성부터 2차 대전까지 노동운동사를 역사의 큰 흐름에서 서술했고 4·5·6권은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39개 국가별로 노동운동 전개 과정을 다뤘다.

글은 허술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교재이지만 이론적 천착도 소홀하지 않았어요. 1988년 <한겨레> 창간 이후 12년간 노동 분야 논설위원을 한 게 도움이 됐죠. 그때 우리말로 써야 쉽게 읽힌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의 사무실 장식장에는 국회 도서관에서 구한 세계 노동운동 관련 학위논문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에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사전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3년 3권을 낸 뒤로도 일본의 고서점을 직접 찾거나 미국이나 일본 아마존 책 목록을 훑으며 자료를 구했단다. “아프리카 쪽은 영국에서 노동운동을 공부하는 한국인 연구자를 통해 자료를 구했죠.” 그는 올해 만 84살이다. “옛날에 알던 영어·일어 단어가 지금은 가물가물해 사전을 많이 봐요.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왜 39개국이나 살폈냐고 하자 “나라마다 다 달라 배울 게 있다”고 했다. “하다 보니 나라마다 다 다른 특징들이 있더군요. 칠레는 사회주의자들이 합법적으로 집권했죠. 브라질 노동자당은 내부 노선 차이를 융합시키는 그룹이 있더군요. 노조에서 대중조직 경험을 쌓은 이들이 그 역할을 해요.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투쟁의 폭이 좁아요. 일제 때도 (노동운동 관련) 법이 없어 지하에서 적색 노조운동을 했죠. 선진 공업국에서는 기업별 노조를 ‘황색 노조’라며 노조로 치지도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산업별 노조 형식은 갖췄지만 내용은 채우지 못했어요. 산업별 교섭을 시도해도 사용자들이 나오지 않아요.”

2001년 연재 계기 39개 나라 섭렵

2007년부터 학습반 꾸려 질의 토론

2013년 이어 최근 4·5·6권 ‘완간’

1848년혁명 파리코뮌 러시아혁명 등

‘16세기 이래 500년 세계민중운동사’

“노동운동과 민주주의는 함께 간다”


<세계노동운동사>의 큰 특징은 노동운동과 관련한 정세 변화 서술이 상세하다는 점이다. “정세 변화를 모르면 노동운동이 이해되지 않아요. 영국 정부가 1790년 무렵 노동자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시행하다 1825년에 노조를 합법화합니다. 불법화하니 노동운동 세력이 다 지하로 들어가 사회가 더 위험해지더라는 거죠. 68혁명이나 중국 문화혁명도 세미나 참석자들이 도대체 뭐냐며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가장 신뢰하는 마르크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68혁명은 혁명이 아니라고 했죠.”

책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노동운동과 민주주의는 함께 간다”이다. “선거권 확대를 목표로 노동자들이 벌인 차티스트 운동이 일종의 민주주의 운동이죠. 노조는 다수로 구성된 합법 조직입니다. 민중의 복지와 자유를 위해 싸워온 가장 강력한 세력이죠. 노조가 위축되면 민주주의 위기가 와요. 스웨덴은 예전에 부강한 나라가 아니었는데 사회민주당이 장기 집권해 지금의 복지 사회를 이뤘죠. 일본은 사회당이 약해지고 노동운동이 보수화하면서 아베가 전쟁 가능한 나라를 만들려 하고 있어요.”

그는 박정희 시절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두 차례 투옥의 고초를 겪은 뒤 한국노총 상근자로 일하며 노동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노총 정책연구실장과 한국노동교육협의회 대표, 민주노총 지도위원,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다. 17년 집필로 노동운동에 대해 새로 얻은 통찰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지난 노동운동의 사건 하나하나는 다 실패의 역사입니다. 파리 코뮌만 해도 몇만이 죽었어요. 러시아 혁명은 승리 뒤 70년이 지나 몰락했죠. 하지만 그 수많은 실패가 다음 단계 승리의 발판이 됩니다. 노동운동은 또 직접 목표로 삼지는 않았더라도 민주주의 실현의 큰 추동력입니다.”

그가 검토한 39개 나라에는 한국도 있다. 김 이사장은 1960, 70년대 한국노동운동의 경향을 두고 노동운동의 자주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노조 내 민주주의를 충실히 실현하지 못했다고 썼다. 8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 쓴다면? “1987년 이후 비약적 발전이 있었죠. 노동운동에서 자율성이나 민주주의가 살아났어요. 민주노총이 생기고 한국노총도 자기 혁신을 시도했어요. 민주노동당을 만드는 등 경제적 조합주의를 탈피하려는 노력도 있었죠.”

하지만 그는 7년 전 나온 1권 서문에서 “한국 노동운동이 전략 목표도 명확히 세우지 못하고 있다”며 ‘심각한 위기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양대 노총 모두 방향성과 운동노선이 없어요. 조합원들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해요. 그냥 총파업만 내세워요. 민주노총은 2000년 단병호 위원장 이후로 정치세력화에 대한 구체적 작업이 없어요. 내부 정파 문제도 있고 민주노총 지도부의 강력한 의지 부재 탓일 수도 있죠. 제일 중요한 게 장기적인 전략과 목표, 노선입니다. 이걸 정리해야 합니다. 문재인 정권을 추동할 수 있는 게 노조가 중심이 된 진보세력인데 구실을 못 하니 본질에서 보수 정당인 민주당을 진보세력으로 여기죠. 이는 민주주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김 이사장이 생각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기본 방침’은 이렇다. “노동자 중심성과 사회주의 지향 그리고 민족과 계급문제의 통합 등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정당을 새로 만들거나 아니면 기존 진보정당의 통합 주체가 되어야겠죠.”

그는 1980년대 이후를 다룬 <세계노동운동사> 속편을 쓸 생각은 없지만 공부는 중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연구회에서 노동운동 조직 형태나 구조 그리고 정치세력화는 어떻게 했는지 또 운동노선은 어떠했는지를 공부하고 있어요.”

문재인 정부 들어 노조 조직률이 소폭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최근 늘어난 것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해 들어와서죠. 민노총에 가입한 학교 비정규직 노조만 해도 몇 만명이죠. 청년유니온이나 라이더 유니언도 조합원 스스로 구성했죠. 노동운동 단체들은 조직확대에 힘을 더 쏟아야 합니다. 명실상부하게 산업별 노조로 가야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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