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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점점 편해지는 세상, 그래서 더 불편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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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4일 서울도서관 대출증을 발급받았다. 방법은 간단하다. 홈페이지에서 회원가입을 한 뒤 신분증을 가지고 도서관에 가면 된다. 직원에게 신분증을 내밀면 카드를 건네준다. “도서관 대출증 발급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문자도 받았다. 카드를 받아들고 잠시 ‘실물카드가 필요한가’라고 생각했다. 역시 편리한 세상! 앱을 깔면 모바일 회원증을 쓸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면서 도서관은 무기한 휴무에 들어갔다. 대신 홈페이지에서 전자책·오디오북 등 디지털 콘텐츠를 볼 수 있다. 서울시민이라면 온라인으로 대출증을 발급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두 달 전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시민이 국민청원을 올렸다. ‘공공도서관에서 본인 명의 휴대폰, 아이핀이 없는 이들도 가입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는 제목이었다. 하루는 어떤 할아버지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도서관에 오셨다고 한다. 본인 명의 휴대폰이 없어 회원가입을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인증 수단인 아이핀(온라인상의 개인식별번호)을 만들려 해도 휴대폰 본인인증이 필요했다. 주민센터에서 아이핀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안내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해줄 게 이 주민등록증이고 이걸 나라에서 줬는데, 나라에서 하는 도서관에서 이걸로 가입이 안 되는 게 옳은 거냐’라고 하셨습니다. 백번 옳은 말씀이셨습니다.”

내가 누리는 편리함을 모두가 똑같이 느끼진 않는다. 때로 기술은 누군가에게 벽이 되곤 한다. 디지털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정보격차)’의 단면이다.

재난 상황에서 짙어진 그림자

3월 16일 아침 일찍 공적 마스크를 사러 나갔다. 구청 블로그에 올라온 약국별 공적 마스크 판매시간을 보니 오전 9시가 많았다. 포털 지도에서 집과 가까운 약국을 확인한 뒤 집을 나섰다. ‘1층 말고 높은 층에 있는 약국을 노려라’는 누리꾼의 조언도 잊지 않았다. 오전 8시 30분쯤 대형 건물 3층에 있는 약국에 도착했다. 첫 손님이었다. 8시 50분쯤 되니 하나둘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9시 3분 마스크 2장을 손에 넣었다. 약사는 “추운데 기다리느라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했지만 비교적 수월하다고 느꼈다. 약국을 나설 땐 10명이 줄을 섰다. 모두 20~40대로 보이는 청년층이었다. 큰길로 이동했다. 눈에 잘 띄는 약국 앞에는 30명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과 노인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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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약국의 마스크 재고현황을 알려주는 앱.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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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오전 대형 약국이 몰려 있는 종로. 70대 할머니가 약국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마스크 있어요?” 약사는 “이따 4시에 오세요”라고 했다. 할머니는 약국 앞에 붙은 안내문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약국 3곳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구청 홈페이지에 약국별 판매시간이 나와 있다고 귀띔했다. “난 몰랐네.” 할머니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날 오전 종로의 약국에서 긴 기다림 없이 마스크를 사는 이들이 더러 보였다. 노인은 많지 않았다.

마스크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새로고침 신공’으로 마스크 구매에 성공했다는 후기가 잇따랐다. 온라인 마스크 판매처 링크와 구매 노하우도 공유했다. 약국의 마스크 재고현황을 알려주는 앱, 마스크 판매딜이 뜨기 5분 전 알림을 보내주는 앱이 등장했다. 매크로(자동입력 반복 프로그램)를 이용해 마스크를 대량 사들인 일당과 비교하지 않아도, 청년과 노인층의 마스크 구입방식은 차이가 크다.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부모님 대신 장을 봐준다는 의미의 ‘효도쇼핑’이란 말까지 나왔다. “나는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에요. 시킬 사람도 없어요.” 한 방송뉴스에 등장한 노인은 마스크 구입이 어렵다며 말했다.

노인·장애인 등 정보 소외계층은 안전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도 힘들다. 안전 안내문자는 글자 수가 90자 이내여서 자세한 정보를 받을 수 없다. 내용도 지자체마다 차이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및 SNS를 통해 확인해주시기 바란다”라고 안내하는가 하면, 링크를 덧붙이는 곳도 있다.

시각장애인 강시연씨는 “확진자 동선을 주로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 형식의 파일로 안내하다보니 음성안내를 받기 힘들다. 정작 조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웹 접근성을 평가하는 일을 하는 그는 “정보를 접하기가 어렵다보니 점점 (찾아볼) 의욕도 안 생긴다”며 “나도 이런데 더 못 하는 분들은 오죽 힘들까 싶다”라고 했다.

낡은 문제가 아니다

패스트푸드점의 ‘키오스크(무인주문기)’ 같은 비대면 거래에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 이야기는 되풀이돼왔다. 모바일 예매 시스템 확대로 입석 탑승객 대다수가 노인이라는 기사도 심심찮게 보인다. 코로나19가 보여준 단면은 정보격차가 낡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닌, 정보 소외계층이 겪는 불편함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점을 시사한다.

현실은 숫자로도 나타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19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고령자·농어민·저소득층 등 정보 취약계층 가운데 고령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가장 뒤처진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디지털 기기 보유 등을 의미하는 접근 수준, 인터넷의 기본적인 이용 능력을 말하는 역량 수준, 인터넷을 양적·질적으로 활용하는 정도인 활용 수준을 포함한다. 고령자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 대비 64.3%에 그쳤다. 저소득층은 87.8%, 장애인은 75.2%, 농어민은 70.6%였다. 전체 취약계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 대비 69.9%였다. 디지털 접근 수준은 97.1%로 높았지만 역량과 활용 수준은 60%대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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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점의 무인주문기.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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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 아니냐’고 말한다. 격차는 기술보급 확산과 대중화로 점차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기술이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정보 ‘활용’ 능력에 차이가 생긴다는 점에서 정보격차는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정보격차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낳을 뿐 아니라 정보격차 자체를 더 크게 만든다.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이들의 영역 안에선 새로운 가능성이 마구 생겨난다. 영역 밖의 사람들은 점점 배제될 수밖에 없다.

정보격차는 ‘정치참여 소외’의 위험도 안고 있다.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치가 이뤄지는 공간으로서 가상공간의 중요성은 더욱 확대되는데 지금의 어르신들은 자신의 공간을 가상공간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며 “사회적 자원을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노인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훨씬 불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가 ‘2017 연령통합 설문조사’ 원자료를 분석한 논문 <고령자 정보격차의 또 다른 위험, 정치참여의 소외>를 보면 청·장년층은 정보 접근의 정도가 높아지면서 정치참여가 증가하지만, 고령세대는 정보 접근의 증가가 정치참여 확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확인됐다. 최 교수는 “고령자의 정보격차가 완화되고 있다는 낙관적인 기대에 갇혀 정보 접근의 양적 성장에 집중해온 기존의 정보화 전략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사회는 ‘정보 접근 기회의 평준화’에 집중했다. 정부 정책 또한 취약계층의 사용 능력 향상에만 초점을 뒀다. 교육은 정보 활용보다는 스마트 기기의 켜고 끄기, 문자·이메일 보내기 등 한정적 사용에만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

기기 보급까지는 정책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하지만 기기를 활용하는 데는 개인적 동기와 욕구가 크게 작용한다. ‘정보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는 ‘정보를 원하는 자와 원하지 않는 자’의 문제가 됐다. 김봉섭 한국정보화진흥원 연구위원은 “정보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정보화의 참여 의지를 높이는 서비스, 정보화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를 위한 맞춤형 서비스가 필요하다”며 “일상생활과 괴리된 정보에 대해서는 개인의 정보 습득 욕구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대상 범주별로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람’을 보자, ‘사람’을 담자

“5~10분 만나러 울산에서 대구까지 오시고, 안동에서도 전화가 와요.” 대구참여연대의 장지혁 정책팀장은 정보격차의 실태를 피부로 느낀다. 어르신들은 각종 어려움으로 상담을 요청해오지만 대다수는 관련 기관이나 절차를 모르는 경우다. 특히 단체의 활동이 방송뉴스에 나오면 각지에서 연락이 온다. 어르신이 사는 지역에도 관련 단체가 있지만 그 존재를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장 팀장은 “‘굶어죽겠다’는 전화를 받고 복지단체를 연결해드린 적도 있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수기로 문서를 써가며 주민참여예산 사업을 제안했는데 프레젠테이션이라는 또 다른 벽에 막힌 적도 있다. ‘정치참여 소외’의 문제다. 그는 “모든 국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있는지 의문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접근통로를 제한함으로써 일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며 “모든 사람이 정보나 정책에 접근할 수 있게 문턱을 낮게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이런 경험을 담아 한 언론에 기고했다. “우리는 오늘날 모든 시민이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인터넷의 정보를 손쉽게 접하고 사용한다는 어떤 특정한 인간의 유형을 표준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표준형, 평균의 인간이라는 것은 결과이고 통계일 뿐 구체적인 사람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표준과 평균의 인간에서 벗어날수록 사회와 국가에서 소외되는 단절된 사람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찾아내고 인식해야 한다.”

휴대폰이 없는 노인에게 대출증을 만들어주지 못했던 도서관 직원도 같은 마음일 테다. 그는 국민청원에 “뒤처지는 사람을 지운 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버린 채,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앞으로 달려야만 했던 시절은 지났다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모든 사람에게 누구나의 책을’. 그가 소개한 도서관학 5법칙 중 하나다. 지금의 현실에선 ‘책’을 ‘정보’로 바꿔놓아도 손색없을 것 같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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