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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세상읽기] 왜 하필 휴지였을까 / 전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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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상진 ㅣ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심각한 위기가 닥쳐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걱정하는 순간이 되면 고심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아무래도 생존에 필요한 물품의 구비일 수밖에 없다. 필요 물품을 구입하여 비축, 곧 ‘사재기’해야 한다. 무엇을 사재야 할까? 어렵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전문적’으로 세상의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을 프레퍼(Prepper)라 부른다. 프레퍼, 즉 생존 전문가의 전공이 물품 비축이다. 사회의 제반 시설이 작동하지 못할 ‘그날’을 가정하여 비축할 물품의 종류와 양을 면밀하게 계산한다. 이제껏 프레퍼는 피해망상에 빠진 편집병자 취급을 받았지만 코로나19의 전세계적 확산으로 그날이 가까워진 듯 보이는 지금 그들의 “내가 늘 말했지”가 돋보인다. 그래서 <에이피>(AP) 통신이 생존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지금 대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실망스럽게도 일반적인 코로나19 대응지침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손 씻기와 재채기, 기침 예절에 유의하고 위생 관련 물품을 충분히 준비하라.” “재정 상태에 유의하고, 긴장을 풀고 패닉에 빠지지 말라”고 추가 조언을 하지만 물품 비축에 대해 특별한 얘기가 없다. 물론 “화장실 휴지가 중요하지만, 손 세정제와 소독제 그리고 위생장갑도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역시 휴지가 중요하다.

홍콩,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미국, 싱가포르,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휴지 사재기가 있었다. 텅 빈 휴지 선반, 휴지를 훔쳐 달아난 강도, 휴지를 사겠다고 다투는 쇼핑객들에 대해 많이 보도되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그런 행태를 #휴지게이트(#toiletpapergate)라고 신기해하고 조롱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마스크를 제외하고 특정 물품의 부족이나 사재기가 문제가 되지는 않고 있다. 그래서 사뭇 신기하다. 왜 하필 휴지였을까? 관련하여 여러 전문가들이 내놓은 답은 대략 네가지다.

첫째, 통제력의 ‘상상적’ 회복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다. 나를 해치는 적이 보이지 않으면 상황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커진다. 두려운 사람들은 특정 물품, 특히 신체와 관련된 식품, 의료품, 옷 등을 구매하려는 충동을 갖게 된다. 그런 충동을 해소하는 구매 행동은 두가지 측면에서 통제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 먼저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거나 어렵게 만드는 물품 구입은 몸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했다는 안도감을 준다. 아마 마스크나 손 세정제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다음으로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 뭔가 행동을 했다는 느낌이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 내 몸을 내가 돌보겠다.’ 아마도 휴지 구매가 그에 해당하리라.

둘째, 사회적 규준화(norming) 또는 포모(FOMO·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다. 고립되는 것을 싫어하고 무리 지어 살려는 군거 본능을 지닌 인간은 트렌드를 놓치거나 소외되면 크게 불안을 느낀다. 휴지를 살 생각 없이 마트에 갔는데 텅 빈 선반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알다시피 휴지는 더미 상품이라 선반이 크다. 텅 빈 휴지 선반은 어떤 공포감마저 줄 것이다. ‘아, 내가 크고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구나.’ 당연히 휴지를 사는 데 애써야 한다.

셋째, 가짜 정보의 역할이다. ‘휴지와 마스크의 원자재가 같기 때문에 마스크 생산을 위해 모든 원자재가 투입될 것이므로 곧 휴지 공급이 끊길 거야.’ 말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정보지만 두려운 우리는 솔깃할 수 있다.

넷째, 미디어의 역할이다. 때가 때인지라 통조림 같은 것이 많이 팔리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런 건 뉴스 가치가 별로 없다. 너무 뻔해서다. 버려진 듯 보이는 텅 빈 휴지 선반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는 고객, 휴지로 가득한 쇼핑 카트를 밀고 가는 비장한 얼굴의 고객들, 휴지를 두고 몸싸움을 벌이는 쇼핑객들, 이게 ‘그림’이다. 그걸 무시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는 단언컨대 없을 거다. 다만, 그런 그림들이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오판하게 만들 수 있다.

스티븐 라이커와 동료들이 영국 심리학회 블로그에 적은 바처럼 “패닉은 맹목적이고 경쟁적으로 자기 이익을 좇도록 만들기에 재난을 비극으로 만든다.”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뿐인 휴지 쟁탈전으로 현 상황을 채색한다면, 사람들은 ‘쟁탈전 참여자처럼 자기 이익을 맹목적으로 좇으면서’ 재난을 비극으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마스크 대란’이 패닉으로 발전하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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