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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금리 내리고 재정 풀어도 대폭락…‘베어마겟돈’ 시작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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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정책 약발 안듣는 ‘코로나 증시’ ]

미 금리 0.5%p·1%p 내릴 때마다

뉴욕 증시는 폭락…‘블랙먼데이’ 연상

“대응할 여력 바닥났단 관측 퍼져

최악의 시나리오 현실화” 지적

[직접 지원 재정정책은 다를거라지만]

1조 달러 ‘헬리콥터 머니’ 발표에도

주가 떨어져 ‘재정 회의론’ 나와

코로나 확산세에 시장 압도된 상황

“둔화 신호 확인돼야 바닥 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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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전격적으로 금리 인하에 나설 때마다 주식시장은 되레 폭락으로 반응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통화완화정책의 약발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상황을 두고, 시장에서는 성경에서 ‘종말’을 뜻하는 아마겟돈과 약세장을 상징하는 곰(베어)을 결합해 ‘베어마겟돈’(Bearmageddon)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백약이 무효’라는 정책 무용론 속에서 ‘위기의 끝은 항상 정책’이었다는 반론도 나온다.

지난 3일 미 연준이 긴급회의를 열어 정책금리를 0.5%포인트 내렸는데도 다우지수는 2.9% 급락했다. 게다가 15일에는 연준이 정책금리를 한 번에 1%포인트 인하해 제로(0.00%~0.25%)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7천억달러 규모의 유동성 공급 방안(양적완화)까지 꺼낸 ‘바주카포’를 쐈지만 미 증시는 1987년 10월 ‘블랙먼데이’를 연상시키는 대폭락 장세를 연출했다. 연준이 이제 실탄을 거의 다 써버려 앞으로 대응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시장에 퍼지며 공포가 외려 커진 것이다.

외신들은 “각국 중앙은행의 전례없는 정책금리 인하와 대대적인 유동성 공급이라는 경기부양 모둠세트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시장은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세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인고의 시간이 어서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체념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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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항할 수 없는 적’과 싸우는 미국 연준

경제매체 <마켓워치>는 “장기간의 통화완화 정책을 통해 가파르게 상승했던 자산가치가 경기침체 우려로 이제 막 정상으로 되돌아가려는 시점에 연준이 끼어들어 최악의 시나리오인 베어마겟돈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주가가 고점에서 하락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중앙은행이 주식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모든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투자자들의 의구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시장은 연준이 더 이상 경제와 자산가치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월가의 투자전략가 사이에서는 연준의 성급한 개입이 일시적으로 증시를 떠받칠 수는 있어도 시장의 자체적인 정상화에는 장애가 되고 있다는 분위기가 감돈다. 투자은행 제이피모건은 “과거에도 연준이 정례회의가 아닌 임시회의에서 금리를 앞당겨 인하한 경우 시장에 부정적 신호를 줘, 미국 주가지수(S&P500)가 1~2년이 지나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이 동요하는 데는 코로나19 사태가 2008년 금융위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이 깔려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사람의 이동이 제한되고 상품과 서비스의 흐름이 막혀 실물경기 전반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금리를 내리고 유동성을 투입한들 소비나 투자가 살아나긴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과는 달리 연준은 지금 ‘대항할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경기침체를 예측하는 지표인 ‘채권 수익률 곡선’을 개발한 캠벨 하비 듀크대 교수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지금은 연준이 장기금리를 통제할 수 있었던 1960년대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하비 교수는 “위험관리에 실패한 기업들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은 불필요하며, 기업운영을 잘해왔지만 이번 사태로 큰 충격을 입을 중소기업 지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제러미 시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도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재무상태가 나빠진 미 석유산업은 구조조정되는 게 맞다”고 잘라 말했다. 저금리가 장기화하면서 빚만 잔뜩 늘어 금융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좀비 기업들에 무리하게 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돈을 푸는 것은 바이러스 대증 요법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은행이 신용경색 위험에 빠진 기업들의 채권을 사들여 잠시 부도를 막는 것은, 병원에서 바이러스를 제거하지 못해 해열제로 열을 내리고 항생제로 염증을 억제하는 대증치료와 같다”고 비유했다.

■ 케인스가 다시 구원할 수 있을까

통화정책은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 반면 재정적 대응은 뒤늦게 시동을 걸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15일 기준금리 인하 결정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통화정책 대응의 한계를 거론하면서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연준은 실직자나 작은 기업체에 직접 도달할 (정책) 수단이 없다”며 “재정정책이 특별한 계층을 직접 지원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헤지펀드의 대부’ 레이 달리오도 지난 16일 소셜네트워크 링크트인에 올린 글에서 “연준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이제는 연방정부의 대규모 재정 부양이 필요하다”고 썼다.

재정정책도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론이 나온다. 코로나19 사태로 수요와 공급 전방위로 충격이 가해지고 있는데 정부가 돈을 푼다고 상황이 달라지겠느냐는 것이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17일 미국인들에게 현금 1천달러(약 124만원)씩을 뿌리는 등 1조달러(약 1240조원) 규모의 ‘헬리콥터 머니’ 계획을 발표했지만 미국 주식 선물시장은 즉각 4%대 급락세로 반응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재정정책의 성격과 파급효과는 통화정책과 다르다고 말한다. 중앙은행이 자금을 풀면 기관투자자나 부유한 개인들이 돈을 빌려 주식과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돈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지 않고 자산시장의 거품만 키울 수 있다. 반면 정부 지출로 돈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으로 생활필수품을 사기 때문에 수요 실종 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 ‘헬리콥터 머니’는 들이닥칠 대량실업에 대비해 가계의 소득을 보전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다만 유효수요 창출을 역설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처방을 따르기에는 지금 미국의 국가부채는 너무 많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트라우마에 갇힌 독일에 재량적 재정정책은 부담스럽다.

허진욱 삼성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이 전례없는 충격에 빠진 지금, 정책에 대한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지금까지 금융시장의 반응이 없다고 해서 정책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시차를 두고 정책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제이피모건은 “미국 정부가 보다 공격적으로 재정정책을 확대하고, 코로나19 확산이 정점을 찍고 둔화하기 시작했다는 분명한 신호가 확인될 때 비로소 증시가 바닥을 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물론 그동안 경기침체 위험이 증시에 과도하게 반영됐다는 점에 투자자들이 공감해야 반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광덕 선임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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