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오페라란 특별한 이름…"한국오페라에만 찾아볼 수 있는 지역적 특징 담겨"
오페라 ‘춘향전’의 한 장면./제공=대구오페라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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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이 창작한 오페라 ‘춘향전’이 처음 공연됐다. 이 ‘춘향전’은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대구나 부산 등 피란지에서도 공연할 정도였다. ‘춘향전’의 인기비결은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와 단순한 멜로디에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이몽룡이 춘향과 사랑을 속삭이며 부르는 이중창 ‘사랑가’는 대중가요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첫 번째 한국 창작오페라는 성공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 언론에서도 ‘춘향전’ 초연에 대해 공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보였고 끝난 뒤에도 창작오페라의 미래에 대해 많은 기대를 보이는 기사를 내놓았다. 1950년 5월 28일 동아일보 2면에 이기현은 ‘春香傳公演의 意義’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다시 말하면 創作오페라를 上演하려면 먼저 外國오페라부터 시작하는 것이 順序이겟고 그보다도 앞서 演奏會形式의 오페라 上演이 자주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고 썼다. 이밖에도 ‘춘향전’ 초연 직후 공연의 성공이나 의의를 다룬 기사를 여러 언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기사나 기고문을 읽어보면 한국인이 만든 오페라를 ‘창작오페라’로 부르고 있다. 그 호칭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현대 한국오페라는 창작오페라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 창작오페라라는 명칭에는 모순점이 존재한다. 한국 창작오페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오페라는 당연히 작곡가와 대본작가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베르디의 창작물이며 비제의 오페라는 작곡가 비제가 창작한 오페라다. 따라서 오페라라는 단어 앞에 창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의미의 중첩이라고 볼 수 있다.
오페라 ‘춘향전’의 한 장면./제공=대구오페라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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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독 한국에서 창작된 오페라를 창작오페라로 이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오페라가 언제부터 창작오페라로 불렸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아마도 일본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보다 서양음악의 수용과 오페라의 탄생이 50년 정도 앞섰던 일본은 자국 오페라를 창작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초기 일본에서 창작된 오페라에 대해 창작오페라라는 명칭으로 부른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 오페라와는 조금 다른 발전양상을 보이는 중국 역시 창작오페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통한다. 우리나라와 중국 모두 일본의 영향으로 서양음악 수용 초기 창작된 자국 오페라에 대해서는 창작오페라로 호칭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늘까지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반면, 현재 일본은 일본오페라로, 중국은 신오페라로 칭하고 있다.
일본이 미친 영향을 떠나서 당시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오페라를 창작오페라로 부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서양의 오페라와 구분하기 위함이고 둘째, 서양의 고전오페라와 비교해 근현대에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창작된 오페라인 점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이처럼 창작오페라라는 단어에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오페라에만 찾아볼 수 있는 지역적인 특징을 담겨 있다.
이런 특징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출발한 우리 창작오페라는 곧 한국전쟁이라는 커다란 걸림돌에 부딪히고 초기 발전 동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했으나 막 탄생하여 기틀을 다지려했던 창작오페라에 있어서는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 상명대 교수(yonu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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