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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곽금주의공감산책] 가족 간 거리두기 또한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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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내 지나친 관계 밀착으로 / 피로·불만 넘어 불화·폭력까지 / 서로 각자 공간·시간 허용하고 / 지켜야 할 규율 만드는 것 필요

우여곡절 끝에 개강이 되었지만 비대면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학생들이 캠퍼스에 모이는 것 자체를 자제하라는 지침이다. 그럼에도 갈수록 캠퍼스 곳곳에 학생들 모습이 눈에 띈다. 복도를 지나가다 무심코 물어보았다. 그들의 답은 집에 있게 되니 부모님과 갈등이 자꾸 생겨서 일단 학교에 나와서 산책이라도 하고 집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지난 16일 대구의 30대 여성은 재택근무하는 남동생이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분개해 남동생을 흉기로 찔러 특수상해 혐의로 입건되었다. 또 독박육아에 답답해 남편에게 산책하러 가자는 말에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사례도 일어났다. 며칠 전 경북경찰청은 가정 내 폭력행위가 발생할 우려에 따라 가정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많은 피해자 총 680여명에 대해 3주간 안전 여부를 면밀히 확인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세계일보

곽금주 서울대 교수 심리학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외부인과의 접촉이 줄어든 것에 비례해 가족 구성원 간 접촉은 현저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전에 비해서 물리적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지게 되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술 마시느라 귀가하지 않던 남편은 이제 삼시세끼를 제공해야 하는 골칫덩이로 전락되었다. 성년 자녀들에게 적응하는 중년 부모들뿐 아니라, 학교와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들 육아에 이르기까지, 가정 내 지나친 관계 밀착은 피로감을 넘어 불만으로 그리고 불화로, 심지어 폭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미 우리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코로나가 시작된 중국의 경우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에서 30년간 폴 매카트니, 마돈나, 웨일스 왕자 등 유명 인사들의 이혼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는 섀클턴 남작부인에 따르면 연중 가장 이혼율이 높은 시기는 여름휴가나 크리스마스 연휴 직후라고 한다. 부부가 같이 보낸 시간이 길어진 직후이다. 미시간 대학의 대니얼 크루거 교수 역시 자연재해로 자가격리를 경험한 부부들을 분석한 결과 출산율과 이혼율이 동시에 급증했다고 주장했다. 물리적 거리가 비자발적으로 좁혀졌을 때 심리적 거리는 양 극단으로 좁혀지거나 또는 멀어지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상대의 단점이 더 잘 보이게 마련이다. 연인들도 연애 초기에는 멀리서 상대를 보게 되니 장점만 보이고 그래서 만남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만남이 지속되어 더 가까이 가게 되면서는 보이지 않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것이다. 그래서 다툼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다투다가 헤어져 멀리 있으면 단점보다 다시 장점이 생각난다. 그래서 화해를 하고 다시 만나게 되지만 또 싸우게 된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가 때로는 피곤함을 가져온다. 그러다 보니 종일 좁은 공간에서 같이 있게 된 가족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회적 지원자가 아니다.

특히나 외부와 고립된 밀폐된 환경에서 생활할 때 심리적으로 격해지고 행동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고립된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면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 사소한 일로 감정조절이 안 되어 불안, 우울, 분노, 적대감이 커지고 극단적 상황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 남극에 파견되었던 사람들에게서 처음 발견되어 ‘남극형 증후군(winter-over syndrome)’이라고도 한다. 교도소, 군대, 그리고 기숙사 등 격리된 좁은 공간에서 공동으로 생활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공간 밀집도가 높아질 때 공격성이 높아지는 것이 이유다. 실험용 흰쥐를 좁은 공간에 격리해 놓고 관찰하였다.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행동했으나 새끼를 낳아 그 숫자가 늘어나 공간이 점점 비좁아졌다. 그러자 쥐들은 공격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서로를 물어뜯거나 죽이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밀폐된 우주선 내 탑승자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 ‘팬도럼(Pandorum)’도 바로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환경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도시화로 인해 밀집도가 높은 아파트나 고층빌딩에서의 군집생활이 될수록 범죄가 증가한다는 지적도 있다.

좁은 공간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면 서로 접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심리적 거리는 상대의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에 더 민감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서로 피로감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외부로 나갈 수 없는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가족이긴 하지만 서로 간의 사생활이 그대로 노출되고 좁은 공간 안에서 밀집도가 높은 만큼 공격성이 나타나기 쉬워진다. 별것 아닌 일로 짜증을 내고 언성을 높이고 결국 폭력까지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외부에서는 바이러스가, 내부에서는 이렇게 가족 간의 불화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간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허용하면서 지나친 간섭을 자제해야 한다. 몇 시에 같이 식사를 할 것인지, 집안일은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등 가정 내 지켜야 할 규율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나만의 시간과 나만의 공간은 인간에겐 재충전을 위한 최소한의 휴식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뿐 아니라 가정 안에서도 서로 간의 규율을 만들고 이를 지키는 적절한 ‘가족 간 심리적 거리 두기’ 또한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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