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6 (목)

전염병·폐쇄도시·가짜 메시아··· 소녀가 떠난 마을에 무슨 일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문학과 영화 사이, 텍스크린-8] 소설 '사탄탱고' vs. 영화 '사탄탱고'

매일경제

2018년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 `사탄탱고` 표지와 1994년작 영화 `사탄탱고` 포스터. 소설 거장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영화 거장 벨러 터르의 전설적인, 아니 그 자체로 전설이 된 명작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벨러 터르라는 이름의 헝가리 출신 영화감독을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처음 들어보셨더라도 괜찮습니다. 세계적 영화감독 중에서도 으뜸가는 거장이지요. 색(色)이 지워진 정념의 흑백영화, 지옥과도 같은 롱테이크 기법, 2시간을 가볍게 넘기는 '미친' 러닝타임은 벨러 터르라는 이름에서 신화의 전모를 감각합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소설은, 터르 감독이 무려 438분짜리 대작(大作)으로 승화시킨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원작 장편 '사탄탱고(Satantango)'입니다. 제목이 무시무시하지요? 악령이나 좀비가 나오는 호러영화와는 족보가 다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툭툭 건드리는 순수한 철학영화라는 표현이 가능할까요.

라슬로 작가는 매년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동구권 내 현존 최고의 소설가입니다. 1985년 쓰여진 그의 대표작 '사탄탱고'를 터르 감독은 집착과 광기 속에서 영화로 만들어 1994년 발표했습니다. 위대한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수전 손태그는 '사탄탱고'를 두고 "죽을 때까지 '사탄탱고'를 매년 1회씩 감상하겠다"고 말했다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도 '사탄탱고'를 베스트 영화로 꼽은 바 있지요. 또 '사탄탱고'는 한강 소설가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기 1년 전인 2015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안긴 작품입니다. 처음 집필된 지 무려 30년 뒤에 영어로 번역돼 상을 안긴 것이지요.

개인적으로는 2018년 알마에서 한국어판이 출간된 뒤 '사탄탱고'를 오래 읽어 왔고, 최근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이 나는 대로 영화를 보고 또 봤습니다. 전설적(的)인 수준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전설이 된, 거의 종교적인 외형을 띠는 탓에 등장인물 내면에 융화돼 버리는 소설과 영화를 소개하기까지 오래 망설였습니다. 어이없게 놓친 부분이나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사탄탱고'가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느덧 경전(經典)과도 같은 지위를 획득한 소설·영화 '사탄탱고'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매일경제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직전인 2019년 10월 8일자 매일경제신문 문화면 기사입니다. 작년엔 아쉽게도 수상에서 빗나갔지만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호명되는 거장입니다. 사진 우측의 올가 토카르추크가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매일경제

이미 1년 반 전에 죽었던 이리미아시는 해체된 집단농장의 주민에게 새 삶의 가능성, 다시 말해 환상을 심어줍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는 신의 대리자처럼 부활을 모방하면서 마을 주민에게 `메시아 알레고리`를 설정합니다. 이리미아시는 정말로 성스러운 구원자였을까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억해야 할 최소한의 인물을 되짚으며 줄거리를 설명하겠습니다. 수많은 인물 가운데 '사탄탱고'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인물은 이리미아시, 에슈티케, 마을 의사, 후터키 등 4인입니다.

공산주의 동구권의 해체된 집단농장에 방치된 소떼 모습을 10분 넘게 따라가는 화면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주민 후터키는 잠에서 깹니다. 예배당이 8㎞나 떨어져 있어 인간의 청력으론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데다 기억하기로는 그곳에 종은 없었습니다. 불길하게 울리는 이상한 종소리는 독자와 관객의 불온한 여정을 암시합니다.

저 마을은 '완벽하게 망한' 상태입니다. 급성 전염병으로 가축이 떼로 죽었고 상권은 붕괴됐습니다. 흉작이 이어지니 돈벌이가 없고 물건을 내다 팔아도 사는 이마저 없습니다. 주민은 서로를 속여 돈을 갈취한 뒤 도망칠 궁리에 빠져 있고 그럴 용기조차 부족한 주민은 허름한 술집에서 보드카에 잔뜩 취해 천천히 부랑자가 돼갑니다. 말파리와 벌레가 식탁에 가득합니다. 그러던 10월의 어느 아침, 이리미아시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소문이 돕니다. 이리미아시는 마을을 재건해 상부의 극찬을 받은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이미 1년 반 전에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망자의 귀환 소식에 마을은 이상한 활기로 가득해집니다. 메시아의 부활로 받아들이는 주민까지 나타나지요. 절도, 사기, 매춘으로 연명하던 주민들은 다시 가슴에 꿈을 품습니다.

이리미아시가 삶의 허기를 달래고 치유할지도 모른다는 환상(幻想)을 뜨거운 주사기로 혈관에 밀어넣듯 순식간에 주입당한 것입니다. 주민들은 말합니다.

"이리미아시가 뭔가 보여줄 거예요. 곧 보게 될 거라고요. 난 그가 죽은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어요…."(소설 '사탄탱고', 38쪽)


처형됐(다고 알려졌)지만 부활했다(고 이해되)며 재림된 성자로 이해되는 이리미아시는, 박해의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유대인을 인도한 모세처럼 마을 주민을 자신의 계획 속으로 안내합니다. 절망과 참혹의 진창에서 유일한 희망을 품어보려는 마을 주민에게 이리미아시는 명백한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를 약속하는 이리미아시의 차분한 어조는 대담하고 마을 주민은 집단 최면에 걸린 듯이 단조로운 지옥인 마을을 떠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매일경제

스스로 부활한 이리미아시는 마을 주민에게 구원의 메시아처럼 다가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인 새 작업장으로 그들을 조용히 안내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계획에 너나없이 동참하겠다며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섭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사탄탱고'와 소설 '사탄탱고' 간 차이점을 여기서부터 비교해 보겠습니다.

원작자가 각본 작업에 직접 참여했고, 감독도 소설에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고 알려졌듯이, 영화 '사탄탱고'는 원작 내용을 대단히 충실하게 구현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와 스크린은 엄연히 다르게 전개되고 있고 축약, 수정, 삭제, 탈락, 전환 과정을 거치며 의미 지평이 전환된 지점도 상당수입니다.

소설을 펼치고 영화를 보고, 또 소설과 재차 대조하면서 10곳 정도 변형된 지점을 찾았습니다. 아마도 '구부러졌다'고 표현함이 옳겠습니다. 아래 글에서는 굵직하게 '구부러진' 지점만 언급해 봅니다(개봉한 지 20년이 넘은 영화이지만 아직 안 보신 분이 다수라 여겨지니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합니다. 불가피한 부분에만 영화와 소설의 서사를 일부 소개합니다).

매일경제

이리미아시 옆에는 페트리너라는 추종자가 따라다닙니다. 이리미아시는 무신론자이고 페트리너는 유신론자입니다. 둘은 종교적 색채가 다르지만 둘의 마을 귀환은 그 자체로 메시아 알레고리를 형성합니다. 이리미아시가 가짜 재림 예수라면 페트리너는 `사람을 낚는` 베드로가 될까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리미아시 곁엔 페트리너라는 추종자가 동행합니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이 '불온한 의도'를 계획하고 마을로 돌아가면서 '환상'에 관한 심오한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영화 대사를 옮깁니다.

"그놈들(후터키 등 마을 주민)은 자신들의 공상에서나 사는 놈들이거든. 한 가지 망상에 떼거지로 매달리지. 환상 없이는 살 수 없는 놈들이거든. 환상을 빼앗게 되면 미쳐서 파괴적으로 변할걸?"


둘은 마을 사람들을 '어떤 계획'으로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이 무엇인지는 영화에서 확인 가능합니다만 망상이자 환상과도 같은 헛된 희망을 품는 일이 인간의 태생적인 조건이라는 식으로 이리미아시가 내린 진단은 뼈가 저릴 만큼 아픕니다. 실체 유무와 무관하게 허상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은 슬픕니다. 꿈이 대개 헛된 희망으로 끝나버리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으니까요.

환상에 관한 둘의 대화는 소설에서는 더 자세합니다.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은 문장이 다수입니다. 음미해보면 대화의 의미가 신앙과 종교로까지 확장됩니다.

"천국? 지옥? 피안(彼岸)?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흘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신은 문자로는 나타나지 않아. 신은 무엇에도 나타나지 않지. 신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든 건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거야. 뿌리칠 수 없는 구속과 시간을 뛰어넘은 대담한 도약 사이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감각이 아닌 오로지 환상만이 우리로 하여금 비참한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끔 유혹하지. 하지만 도망칠 길은 없어. (중략) 그건 우리가 언제나 빠지고 마는 덫이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결국은 자물쇠를 바꿔 다는 일일 뿐이거든."(소설 '사탄탱고', 321~322쪽)


소설 속 대화보다 분량이 줄어들면서 영화는 신앙에 관한 고찰을 상실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첫 번째 차이점입니다.

이리미아시는 신(神)이라는 초월적 믿음까지도 인간의 망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 자체가 '덫'이라고 판정해 버리는 것이지요. 무신론자인 이리미아시는 성경의 욥처럼 절망하는 주민들에게 메시아를 가장해 접근하면서도 자신을 신뢰하고 추종하는 주민의 절망을 철저하게 이용합니다. 인간이 빠지기 쉬운 '신념의 구조'를 간파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리미아시는 주민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메시아 자리를 차지합니다. 자신의 입으로는 단 번도 본인을 신의 대리자로 참칭하진 않지만, 진창과도 같고 지옥보다 못한 폐쇄 도시의 거주민들은 1년 반 만에 재생되는 덫에 걸려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힙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삶이 저당 잡혔는지 모르는 채로 그들은 살아갑니다.

환상 속에 직조된 제2의 환상, 겹겹으로 둘러싸인 또 다른 환상인 셈이겠지요. 그들은 죄 없는 어린 양일까요. 라슬로 작가의 감탄스럽고 위대한 사유가 엿보이는 지점입니다. 어쩌면 그가 건설한 '해체된 집단농장'이라는 배경부터가 번번이 꿈이라는 기의에서 영원히 미끄러지는 인간을 다룬, 데리다식 공간이라는 몽상도 어렴풋이 다가옵니다.

매일경제

`종 없는 종소리`를 듣고 깨어난 마을 주민 후터키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나약한 시민을 상징합니다. 그는 가짜 메시아에 매혹돼 삶을 저당 잡히지만 자신의 삶이 저당 잡혔는지조차 모르고 살게 됩니다. 그는 희생양일까요, 가담자일까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리미아시는 마을로 돌아가기 전 상부를 찾아가 어떤 지시를 받습니다. 사무실의 '소장(소설의 '대위')'은 이리미아시에게 주기적으로 정보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소설과 영화에서 그 부분은 동일하지요. 그러나 소설의 대위가 격앙된 어조로 임무 수행을 강제하는 반면 영화의 소장은 차분한 어조로 지시 이행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자유에 대립하는, 비유적 언어로서의 '질서'에 관한 차분한 대화이지요. 이리미아시의 사유 근간을 이루는 '질서와 자유'에 관한 통찰이기도 합니다. 소설엔 없는 영화 속 소장의 대사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삶이 정말 고귀한 가치를 갖는 건 아냐.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권력자들의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지. 하지만 자유는 인간의 가치가 아니야. 그것은 신성한 그 무엇이지. 진리를 온전히 깨닫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도 짧아. 질서와 자유는 열정이라는 공통의 고리를 갖고 있어. 우린 둘 다를 신뢰해야 하고 또한 둘 다로 고통받게 되지. 인간의 삶은 유의미하고 충만하며 아름답고 추악하지. 인간은 유독 자유만 오용하고 있어. 잡동사니마냥 헛되이 사용하고 있지."


영화에서 소장의 주장은 제목이 암시하듯 '사탄의 혀'를 닮았습니다. 재빠른 혀처럼 날름거리는 순발력, 순식간에 전열을 가다듬는 논리력, 상대의 심장을 움켜쥐고도 한번에 먹어치우지 않고 즐기는 인내력으로 가득한 소장의 말은 인간의 자유를 추앙하는 보편가치에 역행하는 대화입니다. 라슬로 작가가 각본에 참여했음을 다시 상기해 본다면 소설에 없던 대사가 영화에 등장한 이유는 좀 더 정교한 '혀'를 만들어내려 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로써 이리미아시에게 질서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따라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법(질서)"이라는 소장의 뒤따르는 대사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사탄탱고'는 메시아 알레고리와 함께 동구권 해체 이전 공산주의 시스템의 허상을 고발하는 역할도 해냈습니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의 비판적 성찰인 셈이지요. '자유를 오용하는' 인간을 통제하려는 체제를 향한 비판은 영화에 이르러 정교하게 완성됐습니다.

매일경제

영화에서 소장은 자유와 질서라는 인간의 두 가치 가운데 질서를 자유에 선행하는 가치로 설정합니다. 그것의 결과는 질서의 통제입니다. 소장의 명령을 받은 이리미아시는 마을로 돌아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매일경제

마을에서 유일하게 희생되는 소녀 에슈티케는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희생양이 됩니다. 그가 고양이를 껴안고(혹은 걸치고) 걸어가는 장면은 지극한 슬픔의 보행입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속물적 욕망을 위한 거짓 제의의 제물이 돼버렸습니다. 에슈티케는 그 자체로 박해의 텍스트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차이점은, 위에서 여러분이 기억해두길 바랐던 '에슈티케'와 '마을 의사'에게서 시작됩니다.

에슈티케는 불운한 소녀입니다. 영화 포스터 속 소녀가 바로 에슈티케지요. 삶의 모든 정면이 엉망인 엄마는 딸을 방치하고 밀고자에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오빠는 동생을 가축처럼 학대하며 히히덕거리며 매춘에 나선 두 언니는 창고에 숨어 막내에게 무관심합니다. 표현이 온당치는 않겠습니다만 오직 '타의적 자살'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행위로 에슈티케는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싸구려 보드카와 이리미아시가 건네는 헛된 희망에 대취한 마을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소녀의 죽음은 외면당합니다.

소녀의 죽음처럼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마을 의사에게는 기록해야 할 업무였습니다. 사물의 질서에 집착하는 마을 의사는 편집증 이상의 행동을 반복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나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참혹한 형벌인 망각에 저항하려는 듯이 마을 의사는 기억의 한계에 대항하며 모든 일을 기록합니다.

마을 의사는, 마을 안의 인물과 현상과 상태와 운동을 병적으로 집착하며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후터키 등 마을 사람 모두의 '보고서'를 일일이 만든 마을 의사는 상부에 이를 제출합니다. 이유는 간명합니다. 바로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어떤 초월적 시도입니다. 광기(狂氣)에 가까운 집착에 빠져 망각에 저항하려는 시도입니다.

영화에는 아래 대사가 없습니다. 소설 일부를 옮깁니다.

"그는 갈수록 사물들의 질서에 주의를 기울였다. 물건과 물건 사이의 거리, 이를테면 접시와 담배, 성냥갑과 일기장, 탁자와 창가, 안락의자와 벌레가 갉아먹어 부스러질 지경인 나무 바닥에 놓인 책들 사이의 거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중략) 그 중심에 안전하고 전능하게 서 있음을 발견할 때면, 그는 아늑함과 함께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설령 자기가 원한다 해도 이제는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중략) 오로지 기억만은, 그가 맺은 계약이 깨져 죽음과 몰락이 그의 뼈와 살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을 것임을 그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 연결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관찰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도 어느 날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서 저 끊임없이 무너져가는 질서의 말 못할 포로가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소설 '사탄탱고', 86~88쪽)


망각하지 않는 인간은 세상에 없습니다. 망각하지 않고 모든 일을 기억하는 존재는 하나뿐입니다. 바로 신(神)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전능함' 역시 신의 오래된 수식어입니다. 이리미아시에게서 발견되는 '메시아 알레고리'가 마을 의사에게 이르러서는 '메시아 콤플렉스'로 변질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리마이시가 구원자의 행동을 일삼는다면 마을 의사는 자신의 '집필'만이 세상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자신과 세계의 몰락에 대항하는 힘을 내재하리라 확신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떠나 흩어진 뒤 매일 관찰하던 창밖을 나무판자로 막아 완전한 어둠을 만드는 모습도 관찰자에서 창조자로 도약하려는 욕망입니다.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습니다만 마을 의사가 남긴 '최후의 문장'은 명백하게도 신의 지위를 탐하는 창조자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경악할 만한 마지막 장면은 가히 천재적인 수준입니다. 미로 속의 인간이 만든 미로를 들여다보니 다시 처음의 그 미로와 같다는 식의 설정은 경외감에 눈물이 흐를 지경이지요.

어둠 속에서 미로 같은 세상을 창조하는 마을 의사, 부활의 생명이 되어 인간 세계에 재림하는 이리미아시, 십자가 위와 다를 바 없는 고통의 마을에 스스로 누워 목숨을 버리는 에슈티케는 모순투성이인 지옥의 가짜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고 있습니다.

매일경제

마을의 모든 일상을 `기록`하는 의사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신(神)의 지위를 탐합니다. 사물의 모든 질서를 자신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확신이지요. 그것이 만취한 의사의 망상인지 망한 세계를 설계한 자에의 은유인지는 독자와 관객의 판단으로 남겨두겠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마도 나는 지옥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독자들을 위한 작가인 것 같다."

라슬로 작가는 2015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시상식에서 이런 수상소감을 남겼습니다. 마술적인 미신이 종횡으로 배회하는 헝가리의 저 마을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얼마나 같고 다를까요. 지옥의 미학서에 가까운 '사탄탱고'는 영화든 소설이든 분량이 상당한지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예술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노을에 다다르기 전에 한번쯤은 보시기를 권합니다. 소설 첫 장을 펼쳤다가 408쪽의 장편임에도 문단 개행이 거의 없는 장문이 명백히 미친 자의 소행으로 느껴져 영 소화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생의 하루쯤은 온전히 비워두고 7시간 넘는 저 영화에 도전해보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단, 텍스트와 스크린 가운데 하나의 선택만 강요된다면 저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소설 '사탄탱고'를 선택하겠습니다. 마치 그것은 구원(救援)과도 같은 텍스트이니까요. 오호라, 이것도 미혹되는 인간의 부질없는 환상(幻想)일까요.

[김유태 기자]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는 닮았습니다. 기술적 한계를 초월해버린 영화는 소설에 담긴 어떠한 장면도 간명한 컷으로 구현해내는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문자화된 텍스트로서 보이지 않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독자와 만날지, 영상화된 스크린에서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표현력을 보여주며 관객과 대면할지의 차이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설과 영화가 빼닮았더라도 그 간극에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무수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텍스크린(teXcreen)'은 텍스트(text)와 스크린(screen)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해 예술 형식의 변화와 콘텐츠의 내용적 진화를 고민하려는 연재기획입니다. 굳이 'X'를 대문자로 표기한 건 텍스트와 스크린의 컬래버레이션(X) 시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문학이 죽었다고 여겨지는 오늘날, 영화로 만들어지는 소설은 문학의 대중화라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반드시 매회 소설을 완독하고 영화를 다시 본 뒤 두 장르 간 차이를 진단하고 비교합니다. 격주 금요일 오후 온라인 연재됩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