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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일어서며 진화한 인간, 의자 앉으며 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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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십중팔구 이 기사는 어딘가에 앉아 있는 독자에게 읽힐 것이다. 한 곳을 특정할 순 없어도 사무실 의자, 지하철 좌석, 가정집 소파, 식당 테이블 가운데 어느 한 곳이리라는 사실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대개 우리는 앉아 지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의자는 인구수의 총합보다 항상 많았다. 범람하는 의자는 언제나 인간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 의자가 인류사의 태초부터 자연스러운 발명품이 아니었으며 고작 200~300년 전 산업혁명 시대에 대규모로 등장한 후 '순응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인류를 겨냥한 '의자의 겁박'이 시작됐음을 고발하는 책이 출간됐다. 왜일까.

신생대 척추동물이던 인간 발은 보행에 최적화돼 있었다. 거친 발바닥과 긴 종아리 근육은 하루 대부분을 움직이도록 도왔다. 농경생활이 시작돼 걷기가 중단되면서 '인간 버전 2.0'이 탄생했다. '더는 이동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인류는 씨앗에서 싹을 틔우며 굶주림을 해결했지만 신체 능력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산업혁명으로 육체노동이 기계노동으로 대체되면서 '인간 버전 3.0'이 시작됐다. 의자라는 개념은 이때 널리 퍼졌다. 의자는 산업화 시대 새 규율을 내면화하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동시에 학교에서도 의자는 훈육의 궁극적 장소였다. 공장과 학교의 규율 속에서 '앉아 있음'은 적절한 행동의 사회적 표지였다.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그전에는 없던 인류의 행동양식이 등장한 시기도 이때부터다.

과거에 의자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바빌로니아 니네베 유적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가 전해진다. 왕은 언제나 권좌에 머물렀고 이동 중에도 앉은 채로 행차했다. 하지만 의자는 막대한 부와 권위의 상징이어서 역설적으로 일반 대중의 원활한 사용과 거리가 멀었다.

지금 인간은 어디쯤에 와 있을까. 현재 인간은 '버전 4.0'을 가속하는 중이다. 척추는 S선에서 Z선으로 바뀌어가고 추간판 모양은 왜곡된다. 천식 등 바이러스나 세균성 질환도 실내 오염이 원인이다. 간편한 섭취를 조장하는 문화는 인간을 살찌운다. 저자에게 의자는 21세기의 강력한 용의자가 된다.

일을 하든, 밥을 먹든, 공부를 하든 인간은 많게는 주당 100시간쯤 앉은 채로 소일한다. 하루 8시간으로 환산한 수면시간 56시간보다도 길다. 그러니 저자는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자세인 앉아 있기를 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생 인류를 추앙하는 학명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호모 사피엔스 이넵투스(ineptus·어리석은)'로 개명하자고도 덧붙인다. 편안한 것을 좋은 것으로, 쉬운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좋게 느껴지는 것을 진짜 좋은 것으로 오판(誤判)하는 인간의 바보스러움을 꼬집는 용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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