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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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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Interview] 애니메이션으로 근현대문학 알리는 안재훈 `연필로 명상하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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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안재훈 감독이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연필로 명상하기` 사무실 야외 벽화 앞에 서 있다. 그는 "한국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한국인이 만든 토종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에 활짝 꽃피는 순간을 보고 싶다"고 했다.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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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애니메이션 만들기는 자주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빗대어진다. 그만큼 무모한 일이어서다. 이미 미국에는 애니메이션 명가 월트디즈니가 있고, 일본 또한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우리 애니메이션의 숙명이란 결국 이들 골리앗들과의 가망 없는 싸움인 셈이다. 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무수히 던진 계란들이 깨지고 깨져 조그마한 균열 하나를 일으킬지는. 애니메이션 감독 안재훈의 작업이 바로 그렇다. 매해 해외에서 애니메이션 공습이 쏟아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오른손에 작은 연필 하나 쥔 채로 그는 어제도 오늘도 우리 애니메이션의 길을 고민하고 있다. 그렇게 탄생한 첫 장편이 '소중한 날의 꿈'(2011)이었다. 한국의 1970~1980년대 일상을 은은한 수채화처럼 그려낸 이 소박한 애니메이션은 개봉 당시 총 5만3000여 명이 봤다. 대중과 평단이 보낸 환호는 대체로 이러했다.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새 장이 열렸다' '우리나라에도 스튜디오 지부리 못지않은 작품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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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영화로 용기를 얻은 안재훈은 시선을 조금 더 과거로 돌린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뼈아픈 폐허 속에 피어난 우리 소설들이 하나둘 애니메이션으로 빚어지기 시작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봄봄'을 옴니버스식으로 엮은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황순원의 '소나기'가 원작인 애니메이션 '소나기'(2017), 김동리의 '무녀도'를 다룬 애니메이션 '무녀도'(2017)가 그렇게 탄생했다. 왜 안재훈은 아무도 걷지 않은 이 길을 묵묵히 걷게 된 걸까. 서울 명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 '연필로 명상하기'로 가 직접 물어봤다.

―왜 우리 근현대 문학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고 하나.

▷'메밀꽃 필 무렵'이나 '운수 좋은 날' '봄봄' '소나기' '무녀도' 등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 문학들이다. 하지만 가장 빠르게 잊히는 문학들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통과의례처럼 스쳐가듯 접하지만 후에 다시 보지 않는다. 가장 아픈 시대에 쓰인 가장 아름다운 소설들인데도 말이다. 나는 그게 참 많이 안타까웠다. 우리의 오늘을 이루게 해준 지나간 풍경을 세세히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한국인의 정서와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우리 문학의 멋도 알릴 수 있겠다고 봤다.

―문학작품의 이미지화는 쉽지 않을 텐데.

▷왜 우리 단편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알겠더라. 소설을 읽을 땐 손으로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던 이미지도 막상 그리려고 하면 흐트러졌다. 어쭙잖게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일본 것처럼 그려서도 안 되고 말이다. '운수 좋은 날' 만들 때가 특히 그랬다. 우리가 바라본 우리네 풍경이 부재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들여다본 이미지가 없었던 거다. 슬픈 일이다. 그래서 소설 속 문장 하나하나 최대한 상상해보려 애썼다. 여기에 힘들게 찾아낸 자료들을 더해 간신히 작화를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작품마다 한국의 '색'과 '멋'이 느껴진다.

▷매 작품 만들고 나면 학생들을 만나러 여러 학교를 찾아갔다. 어린 학생들 피드백이 참 힘이 된다. 해외 상영 시 반응도 무척 감사했다. 예컨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표현을 보자.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이것을 외국인이 느끼는 데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를 작화 이미지로 보여주면 더 잘 전달된다. 직관적으로 문장이 품은 뉘앙스가 전해지는 거다. 이미지의 힘이랄까. 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봄봄'의 해학미, 그 유머 코드를 외국인들은 이해 못 한다. 나는 이걸 판소리를 통해 보여줬는데 '아,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알더라.

―이미지와 소리로 한계를 극복한 셈인데.

▷3년 전 '소나기' 해외 상영 당시였다. 벨기에의 한 기자가 인터뷰 직후에 말하더라. "나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힘든 여건 속에 있는지 안다. 당신이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길 바란다. 당신네 문학과 한국적 풍경을 그리지만 이것은 언젠가 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저 말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덕분에 극영화에선 실현됐다고 본다. 언젠가 애니메이션에도 그런 날이 오겠지.

―애니메이션 외길을 걸은 계기는 뭔가.

▷난 충남 천안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났다. 어린 시절 혼자 시 쓰고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내 속을 매일 일기로 기록하면서 자연스레 시인, 소설가 등을 꿈꿨다. 그러다 고교 졸업 후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갔다. 먹고사는 일이 급선무였다. 신문 배달, 공장 일 등을 전전하며 틈틈이 일기를 썼다. 스승 없이 데생도 연습했다. 고독했지만 최대한 내 힘으로 익혔다. 유명 만화가들 문하생으로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스물두세 살 무렵 최전방으로 입대했다. 내겐 이때가 제일 중요한 시기다.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비디오를 볼 수도 있었는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같은 걸작도 당시에 접했다. 이 영화를 보고 막연히 꿈꿨던 것 같다. 애니메이션을 해보자고. 여기엔 그림·연기·음악이 다 있지 않나. 시나리오는 문학일 테고.

―하지만 여건이 척박했을 텐데.

▷그래서 전역 후 일본 애니메이션회사에 들어갔다. 때는 1992년 9월,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철인 28호'를 만든 회사다. 당시엔 우리 걸 해야 한다는 의식은 없었다. 하루하루 스태프로서 먹고사느라 바빴다. 그러다 민주화운동을 비롯한 격동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들여다보게 됐다.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우리 삶의 풍경을 비춘 애니메이션이 보이질 않는다.' 그땐 일본 문화가 개방되던 시기다.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 애니메이션을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그즈음 만난 지금의 아내 한혜진 애니메이션 감독과 1998년 '연필로 명상하기'를 세웠고, 쭉 함께 작업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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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나 난관 같은 건 없었나.

▷보통 아름다운 작화를 두고 수채화 같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당시 내가 누구한테서도 기술적인 걸 배운 게 없다 보니 '순수한 기쁨'의 신사동 거리 풍경을 수채화로 일일이 그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수채화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그게 처음이라더라. 이 작품 이후 첫 장편 '소중한 날의 꿈'을 만들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다. 내 작품을 하지 못했지만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그사이 쌓은 것 같다. 이를테면 TV 드라마 '겨울연가'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을 그대로 따라 그려 같은 회차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을 일으킨 드라마들이기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온 거다. 특히나 애니메이션 '겨울연가'는 프로모션을 도쿄돔에서 했다. 이 밖에도 게임, 비디오, 뮤직 비디오, 각종 홍보영상 등을 만들며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어갔다.

―현재 작업 중인 작품이 있나.

▷10년 전 첫 장편 '소중한 날의 꿈'으로 한국의 1970~1980년대 일상 풍경을 보여줬다. 이후 10여 년은 우리 근현대 단편문학으로 한국의 20세기 초중반을 담아내려 노력해 왔다. 지금 준비 중인 건 배경이 지금 여기다. 제목이 '살아오름'인데, 스튜디오가 있는 명동부터 충무로 곳곳을 작화로 다뤘다. 그 안을 살아가는 동시대 주변인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충무로에 있는 매경미디어센터 주변도 등장한다. 말하자면 '소중한 날의 꿈'부터 단편소설 작업까지 긴 기간 우리 과거를 다루었다면, '살아오름'에서 현재를 비추고 궁극적으로 한국의 미래상까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볼 계획이다.

―한국 고유의 애니메이션이 필요한 이유는.

▷어린 시절 우린 디즈니와 일본의 숱한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라 왔다. 자연히 그들이 주입시킨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길들여졌다. 우리 정서가 깃든 우리 고유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면서 이성과 감성을 키우는 게 좋지 않을까. 한국 애니메이션계 토양은 여전히 척박하다. 내가 지금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는 건, 한국 2D 애니메이션이 활짝 꽃피는 순간을 보고 싶어서다. 치유의 힘과 감동의 빛깔을 지닌 작품으로 그 순간을 앞당기겠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틀 뒤 그는 기자에게 긴긴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다. 그중 일부를 옮겨보면 이렇다. "영화가 잘 되어도 결국엔 그 영화를 만든 개인이나 회사가 잘되는 것일 뿐이겠지요. 저는 그걸 넘어서서 어떠한 가치가 공유될 수 있는 작품을 했으면 합니다." 다음은 기자의 답변 중 일부. "감독님이 말한 그 가치를 공유하는 아름다운 작품들, 이전에도 그래주셨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만들어주시길 바라요.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 He is…

1969년 충남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시 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고교 졸업 후 혼자 서울로 올라와 신문 배달과 공장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독학으로 데생을 익혔다. 1992년 나이 스물여섯에 일본의 한 애니메이션회사에 들어가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1998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를 세웠고, 첫 장편 '소중한 날의 꿈'(2011)부터 한국의 유수 단편소설이 원작인 애니메이션들을 선보여 왔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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